달이 빈 방으로 / 최하림 달이 빈 방으로 달이 빈 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 읽고 싶은 시 2014.11.20
저물 무렵 / 강은교 저물 무렵 저물 무렵 네가 돌아왔다 서쪽 하늘이 열리고 큰 무덤이 보이고 떠나가는 몇 마리의 새 식구들은 다시 안심한다 곧 이불을 펴리라 지난해를 다 바쳐 마련한 삼베이불이 곳곳에서 펴지리라 나는 헌옷을 벗고 낡은 피는 수챗구멍에 버린다 곁눈질로 우는 피의 기쁨 뒤뜰에선 오.. 읽고 싶은 시 2014.11.17
자전(自轉).1 / 강은교 자전(自轉). 1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밤 속에서도 빨리빨.. 읽고 싶은 시 2014.11.16
다시 밝은 날에 / 서정주 다시 밝은 날에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 읽고 싶은 시 2014.11.12
가을에 / 서정주 가을에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 - 이마와 가.. 읽고 싶은 시 2014.11.11
고 요 / 서정주 고 요 이 고요 속에 눈물만 가지고 앉았던 이는 이 고요 다 보지 못하였네. 이 고요 속에 이슥한 삼경의 시름 지니고 누었던 이도 이 고요 다 보지는 못하였네. 눈물, 이슥한 삼경의 시름, 그것들은 고요의 그늘에 깔리는 한낱 혼곤한 꿈일 뿐, 이 꿈에서 아조 깨어난 이가 비로소 만길 물 .. 읽고 싶은 시 2014.11.10
신령한 소유(所有) / 구 상 신령한 소유(所有) 이제사 나는 탕아(蕩兒)가 아버지 품에 되돌아온 심회(心懷)로 세상만물을 바라본다. 저 창밖으로 보이는 6월의 젖빛 하늘도 싱그러운 신록(新綠) 위에 튀는 햇발도 지절대며 날으는 참새떼들도 베란다 화분에 흐드러진 페츄니아도 새롭고 놀랍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 읽고 싶은 시 2014.11.05
성모상 앞에서 / 구 상 성모상 앞에서 은방울꽃에서는 성모의 냄새가 난다. 지구의(地球儀) 위에 또아리를 틀고 엎드려 당신의 그 고운 맨발에 깔린 뱀은 괴롭기는커녕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 졸고 있다. 푸른 보리 비린내를 풍기고 지나가는 봄바람이 당신의 흰 옷자락과 남빛 띠를 살짝 날리고 있고 .. 읽고 싶은 시 2014.11.04
나자렛 예수 / 구 상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 치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 읽고 싶은 시 2014.11.03
정(靜)과 동(動) / 구 상 정(靜)과 동(動) 팔당(八堂)과 양평(楊平) 사이 후미진 강기슭 빈 조각뱃전에 한켠엔 내가 앉고 한켠엔 노처(老妻)가 앉아 바람도 없이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있다.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제 백만의 신도가 모인 여의도(汝矣島) 그 찬란한 가설제단.. 읽고 싶은 시 201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