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144

수 필 / 피천득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에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화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진주 빛이다. 비단이라면 ..

햇빛과 달빛 / 석모용

사람마다 개성이 있듯 고양이 또한 개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어릴 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는 고양이를 키워왔지만 함께 산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다. 그러나 검동이(黑黑)와 홍동이(紅紅)는 참으로 특별한 한 쌍의 고양이였다. 그들은 한 배에서 난 자매로 우리 집에 함께 팔려와 살게 되었다. 애완견센터에서 이 두 녀석을 안고 오던 날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었다. 그때 철(慈兒)은 막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고, 칼(凱兒)은 아직 초등학생 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민성동루(民生東路)**에는, 집안까지 햇빛이 쫙 들어오는 아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이 귀여운 녀석들이 바로 우리 집의 햇빛이었다. 아니 아마도 ‘햇빛과 달빛’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홍동이는 어릴 적부터 대단히 열정적이..

뒷모습 / 주자청

아버님을 뵙지 못한 지 벌써 2년 남짓이다. 지금도 내 가슴을 후비는 것은 아버님의 그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아버님께선 직장마저 그만두셨을 땐데 별안간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북경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님 계신 서주로 내려가 아버님을 모시고 문상하려 했다. 서주에서 아버님을 뵈었을 때엔 온 집안이 낭자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생전의 할머님이 생각나서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는 정황에도 아버님은 “어쩔 수 없는 일이군. 울어서 될 일이 있담 ? 설마 산 입에 풀칠 못하겠나?” 집에 돌아가자 이리저리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히고 나니 살림은 쓸어간 듯 비어 버렸고, 거기다 장사 빚만 소복이 남아 있었다. 집안 꼴이 이쯤 되면 말이 아니었다. 할머님 장사 때문도 그..

사막의 가르침 / 정호승

아침에 일어나 잠시 사막을 생각해본다, 중국 서안에서 비행기를 타고 둔황으로 가면서 내려다본 고비사막과, 명암의 대비가 극명하던 둔황의 모래 산 명사산과, 둔황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면서 보았던 사막을 생각한다. 사막은 단순히 지구의 육체가 아니라, 지구의 정신과 영혼의 모습인 것 같다. 사막을 생각하면 왠지 현실적 갈등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다 못해 경건해진다. 사막의 황량함이, 그 황량함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는 내 욕망의 밧줄을 한순간 놓아버리게 만든다. 아마 가난하다고 느껴지는 오늘의 내 삶이, 실은 그 얼마나 풍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나의 현재적 삶이 사막 한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막막하다. 뜨거운 모래바람만 불어올 뿐..

자기를 찾는다 / 홍윤숙

불타가 되신 석존의 구도정신은 생노병사를 짊어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었고 볼 수 있다. 그 지각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의 석존의 생활은 세속적으로 행복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각에 이른 그의 마음은, 어떠한 부귀영화로도 채울 수 없는 고뇌를 안고, 마침내 그 해결을 구해 사문 沙門에 들어가신 것이다. 이것은 석존이 허망한 세속적 부귀영화에 가려져,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 나선 일대 결단이었던 것이다. 자기를 찾는다는 것의 중요함을 설교한 석존의 사상은, 젊은이들을 교화한 일화 가운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날 숲속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에게 설법을 하고 계셨을 때, 한 여자가 그들의 소지품을 훔쳐 달아났다. 젊은이들은 달아난 여자를 찾으려고 그 뒤를 쫒아갔다. 이 때 석존께서는 “그대..

빈 뜰 / 법정

다래헌(茶來軒)에서 살던 때였다. 뜰에는 몇 그루의 장미꽃이 피어, 담담하던 내 일상에 빛과 활기를 드리워주었다, 아침이슬을 머금고 갓 피어난 한 송이 꽃을 대했을 때, 말문이 막히고 눈과 귀가 멀려고 했었다.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 전율을 느끼던 그런 시절 이었다. 장미 가시에 찔린 데가 덧나 사뭇 불안해하면서 병원을 찾아다니던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름다움 속에도 가시가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시뿐이랴, 풍뎅이와 진딧물이 노상 아름다움을 괴롭힌다. 절에서 일하는 일꾼이 하루는 분무기를 매고 채소밭쪽에서 오는걸 보고 장미에도 진딧물 약을 좀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잎들이 시들시들 쳐져있었다. 약을 너무 진하게 타서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 날은 까맣게 타들어가서 잎이 떨어..

나그네 길에서 / 법정

사람들의 취미는 다양하다. 취미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적인 여백이요 탄력이다. 그러기에 아무개의 취미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밑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 물론 개인의 신체적인 장애나 특수 사정으로 문밖에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대개의 경우 여행이란 우리들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호주머니 실력이나 일상적인 밥줄 때문에 선뜻 못 떠나고 있을 뿐이지 그토록 홀가분하고 마냥 설레는 나그네 길을 누가 마다 할 것인가. 허구한 날 되풀이되는 따분한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다. 봄날의 노고지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저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훨훨 떨치고 나그네 길에 오르면 유행가의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인..

야래향(夜來香) / 윤모촌

밤에 향기를 낸다 해서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한 꽃은 실상 꽃답지가 않다. 혹(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향기도 향기려니와, 꽃 이름에 더 마음이 사로잡힌다. 말없이 곁으로 다가서는 정인(情人)의 기척을 느끼게 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반가운 손(客)처럼 마주치게도 한다. 무념(無念)히 다가서게 하는 이름이며, 마력(魔力)의 향기를 지닌 꽃이다. 매력 있는 이름이 이보다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선영의향(扇影衣香), 은은한 미인을 연상케 하고, 중국이 원산이어서 그런가, 대륙의 풍정(風情)에 잠기게도 한다. 호궁(胡弓)의 애련한 엘레지가 들려오는 듯도 하여, 역시 대륙의 꽃 능소화(凌莦花), 협죽도(夾竹挑)등에 어우러져 환상의 나라로 이끄는 이름이다. 그리하여 서시(西施)와 양귀비(楊貴妃)의 거실 곁으로도..

산 마을에 오는 비 / 윤모촌

길을 가다 비를 만나게 되면 나무나 추녀 밑으로 들어가 긋게 되는데, 아무래도 젖게 마련이다. 어쩌다 동성(同姓)인 남자 우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용기가 안 나고, 여자 우산 속으로는 더더구나 들어설 수 없다. 이쪽에서 우산을 받고 갈 때도 그러해서, 여성을 불러들이자니 이상 한 눈으로 볼 것이고, 남자를 들이려 하다가도 선뜻 내키지 않아 피차가 그대로 간다. 이것은 서로가 옹졸한 탓이다. 이들 가운데는, 물독에 빠진 쥐처럼 비를 맞으며 쏘다니는 아이가 있다. 심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욕구불만의 증상이라 한다. 기쁨이나 슬픔 따위로 충격 상태에 있을 때가 그러하다는 것인데, 나도 비가 오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던 때가 있다. 육친과 남북으로 갈린 쓰라림이 그렇게 했던 모양이다. 광복 다음 해, 그해..

조춘(早春) / 피천득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비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내게 효과가 있는 다만 하나의 강장제는 따스한 햇빛이요. '토닉'이 되는 것은 흙냄새다. 이제는 얼었던 혈관이 풀리고 흐린 피가 진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젊음'이 초록빛 '숫 케이스'를 마차에 싣고 넓어보이는 길로 다시 올 것만 같다. 어제는 나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거리에 나갔다가 감기가 들었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걸음걸이에 탄력이 오는 것을 느꼈다. 충분한 보상(報償)이다.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응얼거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겨울이 되어 외투를 입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봄이 되어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더 기쁜 일이다. 아무리 포근하고 보드라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십년이나 입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