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한은 보랏빛 / 천경자

윤소천 2019. 11. 17. 11:15

 

 

 

동네 친척 집에 경사가 나 타관에서 새색시가

온 날이면, 어머니 장롱 속에 들어 있던 남색과 적색 치마가

꺼내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어느 새색시는 단속곳 위에 남치마를 두른 다음 그 위에

붉은 치마를 다시 두르고, 노랑 저고리를 맞춰 입고 어디선가

빌려 온 원삼 족도리를 걸고 차일 밑에서 폐백을 올렸다. 모란 무늬가

띄엄띄엄 새겨진 갑사 치마는 속이 비쳐 보여서 멀리서

 보면 남빛과 붉은 빛이 합쳐져 깊은 샘 속에 깔린 신비한 보랏빛으로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보랏빛은 어딘지 한과 인연이

있는 빛깔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잘롱 속에서 들려 나갔다 돌아온 치마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던 날 입었던 치마였다. 앞 이마 위의

머리가 유독 허옇게 센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가 누워계신 방으로

들어가, “엄마, 그 엄마 시집올 때 치매 말이시, 남치매, 붉은 치매

있었제. 저구리는 안 보이는디 노랑 저고리였소?” 물어 보았다.

“배추색 저구리에 반호장이제.” 상상만 해도 울고 싶도록 곱고 아름다운

빛깔들이다. 지금 어머니의 목소리는 삭아 가라앉았고 내 목소리

역시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어린 시절 집 안에 울려 퍼졌던

엄마의 소리는 정말로 곱고 아름다운 보랏빛이었다.

 

어느 초가을.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가다 목이 말라 “아부지,

물 묵고자와…….” 하며 울상을 지었다. 아버지는 이것 야단났다는 듯

주위를 휘이휘이 훑어 보고는 ‘옳지’하는 표정으로 물외밭에

달려가 노오랗게 센 씨오이를 따서 ‘톡칵’ 분질러 주면서 “아나,

이 국물을 빨아 묵어라.”목을 축여주셨다. 그 빛깔……. 내가 자라자

우리 집은 몰락했고, 해방과 6.25, 나의 불행한 결혼에 이어

여동생의 죽음을 차례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약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보호해주던 혈육은 그렇게 하나 들

세상을 뜨고 지금은 어머니와 동생만 남아 있다.

 

 한이란……. 깊은 우물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색.

파란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분위기, 홍두깨에서 돌돌 풀려 나온 빛깔.

다듬이방망이 소리, 신경질이 섞여 화사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흥타령 곡조, 이제는 삭아 가라앉은 소리, 무턱대고 야산을 걸어 헤치느라

풀 밟는 소리, 그리고 그 빛깔과 소리에서 어슴푸레 느껴지는

그 무엇인 것 같다. 그러나 진실로 한이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슬픈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서 사라진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고

내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