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수필집이 손에 들리면, 장애를 받는 시력을
불구하고 책을 펴든다.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이 머리말인데, 이 머리말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하면, 머리말에
이끌려 본문까지 읽게 되는 것도 있다. 수필집 머리말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 편의 수필처럼 쓰는 글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책이 나오게 됐다는
독자에게 예비적으로 이해를 돕는 실용문이다. 그런데 온갖 수식어로 장황하게
꾸며 쓴 것이 있어 읽어나갈 수가 없고, 내용도 보지 않아 알만 하겠다
해서 책을 놓고 만다. 본문을 읽어보면 과연 그러해서,
한 편을 다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게 한다.
본문의 경우 책을 놓게 하는 것이 서두의 부분인데,
이를테면 계절에 관한 것일 때, 두어 문장이면 계절감각은 다 나타나서,
독자는 그것으로 충분히 유추(類推)확대가 돼, 계절에 관한 것은 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필자는 혼자서 도취되어, 이미 앞서가 있는
독자를 뒤따라오면서 말하기에 열중이다. ‘다 알았으니
그만 하시오’하는데도, 자꾸 뒤쫓아오며 설명하는 격이어서 자연히 읽을
맛이 없다. 이와 같은 일은 중심부분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독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기가 일쑤인데, 대상을 잔소리 혹은 군소리가 아니게
개념화해서, 문장을 밀도 있게 축약해야 독자는 빨려든다.
책을 들면 나는 또 작품의 길이부터 보게 된다. 작품이 긴 것을
보면 축약하지 않아 밀도가 없지 하고 보는 것인데, 과연 그러해서 3분의 1가량은
깎아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다. 내 글에도 군더더기가 끼여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눈에는 잘 들어오질 않아서, 퇴고를 거듭해야 한다. 나는 책을
펴들면 차분히 읽어보기 전에 또 책장을 넘기면서, 문장의 외형부터
본다. 먼저 단락이 잘 지어졌나 하는 것인데, 문장에는 단락이 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본문 서두의 첫줄부터 끊은 것이 보인다. 이처럼 단락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듯 한 것을 보면, 문장의 단락 의미를 모른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산문(수필)구조의 논리를 모른다는 것이 된다. 소재를 작품화할 때는
작자의 체험에 사유와 대상의 개념들이 덩어리가 되어 단원을 이룬다. 이것이
문단이고, 이 같은 요소별 단락을 유기적으로 조직해 나갈 때 작품이 된다.
그러므로 행(行)길이를 자주해서 토막글을 쓰는 것은, 사고의 깊이가 없이 앞뒤
문장과 연관이 없이도 되는ㅡ사고의 파편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
안이한 자세의 서투른 글이다. 그렇다면 행갈이는 어떤 경우라야 하는가.
앞문장의 단락적 요소와 개념이 달라질 때가 된다. 주택의 구조로
비유해 본다면, 주방의 경우 각기 다른 기능의 기구들이 있다. 그런데
이 기구들이 다르다하여 그것을 행갈이로 쪼개 쓴다면, 주방의
구조개념은 조각조각 나서, 주방이라는 공간개념은 없어지고 만다.
이와 같은 문단은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장이 외형상으로 서투르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 또 있다.
앞 문장과 이유도 없이 한 행을 비우고 건너뛰는 문장이다. 건너
뛰어야할 경우는, 주제는 하나이되 앞의 문장과 소재의 내용이 전혀 달라서,
문맥이 이어지지 않을 때이다. 가령 행복이 주제라면, 젊은이의
행복한 이야기와, 노부부의 행복한 실상은 주제로는 같지만 소재는 전혀 다르다.
이런 때이면 한 행을 건너뛴다. 한 행을 건너뛰면 이와 같이
다른 내용이라는 글인데,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 서투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책을 펴면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 또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쉼표(,)이다.
이 쉼표를 대부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철저하게 지켜야 할 이 부호를
가볍게 여기는 요인은, 시 형태에서 온 것으로 짐작이 가는데, 쉼표를
너무 잦게 찍어도 시각적으로 장애가 되나, 찍지 않거나 잘못 찍으면 문맥에
중대한 오류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읽을 때에 피로를 느끼게 한다.
가령 ‘혼자 생각하다가 말없이 떠나간 그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그와 사귄 것이
헛것임을 알았다’는 구절이 있다고 하자. 우선 쉼표가 없어 지루하다.
여기에 쉼표 하나가 찍히면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를 보자. ‘혼자 생각하다가,
말없이 떠나간 그를 생각하면......’이 되면, 혼자 생각한 사람은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작자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떠나간
사람의 말일 수도 있어 뜻이 모호해진다.
이밖에 쓰이는 감탄과 강조의 느낌표(!)와 의문을
나타내는 물음표(?)가 있다. 이 두 가지 부호는 우리말 체계에서는,
문장 자체에 감정이 들어있어 찍을 필요가 없는 부호이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조국의 광복이었던가!’하고, 감격을 강조하고자할
때는 부호를 써야하지만, ‘아침저녁 바람이 소슬하다. 벌써 가을이다!’
하면, 차분해야할 문장에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격이 돼서, 문장의 정서가
혼란해진다. 이와 같은 부호가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호가
감정표현의 분명한 부분이어서, 남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말 자체에 감정이 담겨있을 때에 붙이는 것은
군더더기이며, 이것은 영어 문장에서 온 형식이다. 우리의 경우는
‘그것이 무엇입니까’이면 이미 의문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물음표가 붙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부호가 감정 표현의 방법인 이상
붙여야 할 경우는, 부호가 들어가지 않음으로 해서 뜻이 모호해지는
경우라야 한다. 가령 ‘그 말은 네가 한 말이지’로 썼을 때, 이 문장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긴다. 물음표(?)가 없으면 상대방이 한 말을
묻는 말이 된다. 이밖에 문장의 결정적 흠이 되는 것들을 졸저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다룬 바가 있다.
좀 다른 얘기가 되지만, 한가지 더 들어보기도 한다.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면 소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소감이 쓰기
쉬우면서도 쉽지 않아서, 종종 조소(조(嘲笑)거리가
된다고 하는 이가 있다. 기뻐서 말하는 소감인데 그럴 까닭이 무엇이냐
하겠지만, 말하기가 묘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당선소감을 보면,
지도한 사람의 실명이 거명되는데, 이것이 바로 거슬리는 부분이다.
지도강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긴 하나, 그것이 오히려 폐가 된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지도를 하고 받고 한 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머무르는 일이고, 이것이 공 기능을 띠는 인쇄물에
의해 공개적으로, 광고 선전물처럼 드러낼 성질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가령 권위 있는 학자의 지도로 학술논문이 통과됐다면,
사회적 검증에 의한 학자의 권위로, 그의 실명은 독자에게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수필당선 소감에서 韓大路 선생님 지도로
운운하면, 긍정할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韓大路 정도구먼…하고 거부할
독자가 없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선생님’ 하고 ‘님’자를
붙여 극존칭으로 공개하는, 당선자가 사석에서 할 말이고, 일반 독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거명 당하는
사람이나 거명하는 사람이 함께 웃음거리가 되기 쉬우므로,
지도해 주신 분쯤이면 잘못된 것이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글을 쓰거나 지도하는 사람은, 글 못지않게
인격적인 면이 독자에게 작용을 하는 까닭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당선소감만 보고도, 그 사람의 품격과 역량을 짐작케 한다.
가족의 협조가 어떠어떠해서 기쁘다고 공개하는 것 따위인데,
이런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당선자의 격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표현도 가족끼리 할 말이고, 당선소감이라면 적어도
문학수업에 따른 고뇌라던가, 글쓰는 자로서의 자세 따위로,
통속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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