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쪽 바닷가에
사는 친지로부터 매화가 피었다는
봄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곳은
춘설春雪이 밤새 내렸다. 뜰에 나가
보니 잔설이 쌓여있는 산수유
매화의 꽃눈이 또렷해져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졀,
무서리에 자지러진 가을을 지나
눈 내린 혹한의 겨울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그러나
그 고뇌와 아픔의 시간 들이 이제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작은 구름이 가볍게 하늘을
흘러간다 /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꽃은 풀숲에서 웃는다 /
어디를 보아도 고단한 눈은 이제 /
책에서 읽은 것을 잊으려 한다 /
내가 읽었던 어려운 것들은 / 모두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으며 /
겨울날의 환상에 불과했다 / 나의
눈은 깨끗하게 정화되어 / 새로이
솟아나는 창조물을 바라본다 / 그러나
모든 아름다움의 무상함에 대해 /
내 마음에 쓰여 있는 것들은 / 봄에서
봄으로 남겨져 있으며 / 이제는 어떤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으리.” 이는
겨울을 지나 인생의 봄을 맞은
헤르만 헤세의 시詩 ‘헤세의 봄’
전문이다.
사랑은 먼길 돌아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인생의 모든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전
아담과 이브는 사랑으로 평화로웠다.
봄을 사랑의 계절이라 하는 것은,
조물주의 섭리로 만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주의 사랑에 눈뜨기 때문이다.
현재는 존재의 전부이며 존재 자체이다.
내 마음의 봄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지금이다.
길 건너 대나무숲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오늘은 더 청아하게 들리는
아침이다.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하며 봄의 기운을 느껴본다.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니 봄의
느낌이 상큼하게 다가온다. 봄의
음악으로 비발디의 경쾌한 봄도
좋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슈만의
중후한 봄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클라라와 슈만의 사랑은 음악사에
보기 드문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이순耳順이 되어 잊고 있었던
글을 다시 쓰면서 내 안에 움트는 사랑의
새싹은 나와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싱그러운 새 아침, 한낮의 푸른 숲,
비 내린 뒤 맑게 갠 하늘, 붉게 타는
저녁노을, 산등성이에 떠오르는 밝은
달과 밤하늘의 별, 이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나 처음 본 듯 신비하고
경이롭기만 했다.
나는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의 봄이 오는 길목에 서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지난겨울 미처
하지 못했던 뜰을 청소하며
봄맞이를 해야겠다.
(광주수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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