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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 홍윤숙

우리는 왜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면 마음 설렐까 그 길에 뜨는 해는 무엇이 다른가 큰 숲에 이르는 작은 숲이 있고 숲길 사이로 냇물 흐르고 냇물 건너 마을엔 어진 사람들 모여 살 것 같은 따뜻한 화덕에 활활 불 피워놓고 낯선 나그네들 융숭히 맞이할 것 같은 그 길 위에 하나의 세계가 다가오고 다가와 눈부신 아침을 열고 해와 달 별들이 새로운 날을 열 것 같은 악보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어린 풀들 무릎에 안고 춤추는 길 실바람 머리칼 나부끼며 누구나 한번은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서 세상을 여는 또하나의 열쇠를 가슴 두근거리며 두 손에 쥐어본다 그러나 열쇠는 이윽고 녹이 슬고 그 길도 지나온 길과 다를 것 없음을 희망과 실망은 언제나 손등과 손바닥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읽고 싶은 시 2014.02.17

차나 한잔 / 정호승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자나는 동안 찻잎 한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 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읽고 싶은 시 2014.02.15

눈을 감고 / 홍윤숙

언제부터인가 나는 눈을 감고 밥을 먹는다 눈을 감고 세상을 보고 눈을 감으면 씹는 밥알 한 알의 맛이 더 깊어지고 현란하게 채색된 세상이 한 장 수묵빛 그림이 되고 그 그림 위로 소슬한 바람 불어 하얗게 지워진다 눈을 감으면 떠돌던 내가 내안에 들어오고 온 세상 소요도 잠잠히 잦아들고 내 안의 물결치던 크고 작은 이랑들이 하나로 모여 허공을 만들고 출렁이던 가슴 서서히 가라앉고 텅 빈 허공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해진다 아직 내가 이곳에 살이 있음이 눈부시고 죽음 같은 고독이 꽃잎인 양 향기로워진다 눈을 감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더욱 깊이 확인하고 깨닫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눈을 감는 것은......

읽고 싶은 시 2014.02.12

꽃다지 / 도종환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있는 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14.02.09

두 시인의 마음 / 고은

“우리는 시의 육친입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술이 옴짝달싹 못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술의 혈육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8월 17일 밤 남산 허리의 하얏트 호텔의 만찬장에 였다. 이산가족 방문단 북쪽 인사들과 서울의 내빈들이 어우러져 만원을 이루었다. 나는 당연히 북쪽 계관 시인 오영재와 한동안 부둥켜안은 몸을 풀지 못했다. 10년 전 남북작가회담의 좌절로 만나지 못한 북쪽 작가 5인 중의 한 사람이던 그를 기억한다. 당시 그가 판문점 회담 장소에 와서 라 는 시를 써서 남쪽 작가 5인의 빈자리를 노래한 적이 있다. 2년 전 15일 간의 북한 편력 중에도, 두 달 전 남북정상회담 수행 때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두 시인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속으로만 서로 만나고 싶어..

산 위에서 / 이해인

1. 산을 향한 내 마음이 너무 깊어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 하지 못했다. 마음에 간직한 말을 글로 써 내려고 하면 왜 이리 늘 답답하고 허전해지는 걸까. 2. 나무마다 목례를 주며 산에 오르면 나는 숨이 가빠지면서 나의 뼈와 살이 부드러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고집과 불신으로 경직되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유순하게 녹아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3. 산에서는 시와 음악이 따로 필요 없다. 모든 존재 자체가 시요 음악인 것을 산은 나에게 조금씩 가르쳐 준다. 날마다 나를 길들이는 기쁨을, 바람에 서걱이는 나무 잎새 소리로 전해 주는 산. 4. 내가 절망할 때 뚜벅뚜벅 걸어와 나를 일으켜 주던 희망의 산. 산처럼 살기 위해 눈물은 깊이 아껴두라 했다. 내가 죽으면 편히 쉴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오늘도 조..

읽고 싶은 시 2014.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