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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닮은 촛불 / 신달자

불을 켜면 바닥이 다 타버릴 것 같은 수명 다한 색색의 사연들 가녀린 뿌리 하나 남기고 오래 몸 사르다 갔다 몸을 비운 것들 상자에 가득하다 떨리는 불빛 하나와 떨리는 침묵의 말로 성심 다한 상견례 끝나면 저 강물 아래 흐르는 말 저 구름 아래 흐르는 말 말하지 않아도 말이 되는 그 촛불 속 응답 나 그로써 오늘 성한 사람으로 서 있다 녹아 내리는 것들은 비틀거리는 내 마음의 밑돌로 채워져 안을 밝히는 촛불 안으로 스며들어가 상생(相生)의 불로 다시 켜지는 말 없는 말 그리고 당신의 끄덕임

읽고 싶은 시 2014.05.08

작아지는 발 / 신달자

새봄 새순같이 부드러워 혼자 걸 수 없었던 내 발은 처음으로 혼자 섰을 때의 환호하는 어머니의 기억을 갖고 있다 시골 흙길과 들길을 발 부르트게 다닌 개구쟁이의 기억은 내가 알고 있는 일 서서히 내 발은 자라 고무신에서 하이힐을 신으며 세상을 밟고 살아오면서 고무에서 가죽으로 내 마음도 단단해졌다 오징어 배보다 더 큰 배를 신고 싶었다 비행기같이 하늘을 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 어머니를 누르던 키 큰 사람들을 놀려주고 싶었다 날쌘 파도와 바람을 가르며 장부丈夫 같은 바람을 가르며 돛으로 깃발로 휘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높고 발은 작아 온몸에 버거운 퇴적물만 쌓여 군더더기의 살들이 무거웠을까 자꾸만 한 문수씩 줄어드는 내 발 내 몸의 은근한 양심수인가 헛된 것의 하중을 내 발이여! 내가 스스로 알고 있것다!

읽고 싶은 시 2014.05.07

보통 법신(普通法身) / 황동규

‘그대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다른가?’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예수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의 답은 이렇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비로자나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노랑나비 하나가 몇 번 앉으려다 앉으려다 말고 날아갔다. 불타는 혼잣말인 듯 말했다. ‘청정 법신 보다 며칠 전 나에게 와서 뭔가 빌려다 빌려다 한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더 눈에 밟히네.’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예수는 혼잣말을 했다. ‘저 바다 속 캄캄한 어둠 속에 사는 심해어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지.’ 어디선가 노란 낙엽 한 장 날아와 공중에서 잠시 머물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읽고 싶은 시 2014.05.06

그럼 어때! / 황동규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 괴괴하다. 비가 창을 한참 두드리다 만다. 한참 귀 기울이다 만다. 고요하다. 생시인가 사후(死後)인가. 태어나기 전의 열반(涅槃)인가? 앞으론 과거 같은 과거만 남으리라는 생각. 숨이 막힌다. 실핏줄이 캄캄해진다. 일순 내뱉는다. 그럼 어때! 비가 다시 창을 두드린다. 나뭇잎 하나가 날려와 창에 붙는다. 그걸 때려고 빗소리 소란해진다. 빗줄기여,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이어온 몸살과 몸살의 삶. 사로잡힘, 숨막힘, 캄캄함, 그리고 불현듯 긴 숨 한 번 들이쉬고. 그럼 어때! 이게 바로 삶의 맛이 아니었던가? 한줄기 바람에 준비 안 된 잎 하나 날려가듯 삶의 끝 채 못 보고 날려가면 또 어때! 잎이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만 본다.

읽고 싶은 시 2014.05.05

지옥의 불길 / 황동규

‘저 난감한 지옥의 불길은 결국 가상현실의 불길이군요?’ 키보드를 두드리다 몸을 돌이키며 원효가 묻자 불타는 답했다. ‘불길이 대체 어디 있지?’ 원효가 이번엔 예수에게로 몸을 돌리자 예수가 속삭였다. ‘지옥이란 이 세상 관계들이 죄 끊겨지는 삶일세, 생각마저 하나하나 끊겨지는.’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길 기다리겠지!’ ‘그러면 내세도 시간 속에 있군요.’ ‘그렇다. 시간도 시간 속에 있다.’

읽고 싶은 시 2014.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