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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 / 구 상

내가 새로와 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쓰라림과 괴로움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율조(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意識)은 이성(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 친다 꿈은 나의 충직(忠直)과 일치(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祈禱)는 나의 일과(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生涯), 최고의 성실로써 꽃피울 새해여 !

읽고 싶은 시 2024.02.12

두 그루 은행나무 / 홍윤숙

두 그루 은행나무가 그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때가오니 한 그루는 순순히 물들어 황홀하게 지는 날 기다리는데 또 한 그루는 물들 기색도 없이 퍼렇게 서슬 진 미련 고집하고 있습니다 점잖게 물들어 순하게 지는 나무는 마음 조신함에 그윽해 보이고 퍼렇게 잘려 아니다 아니다 떼를 쓰는 나무는 그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 알 수는 있지만 왠지 일찍 물든 나무는 일찍 물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그윽해 보이는데 혼자 물들지 못하고 찬바람에 떨고 섰는 나무는 철이 덜든 아이처럼 딱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을 닮았나 봅니다 날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마주 서서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 집 앞 가을이 올해도 깊어 갑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8

그리스도 폴의 강 36 / 구 상

​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 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이고 이뤄질 것이다 ​ 저 망망한 바다 한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 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

읽고 싶은 시 2024.01.27

눈 내리는 길로 오라 / 홍윤숙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서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밞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읽고 싶은 시 2024.01.24

자존심에 대한 후회 / 정호승

나에겐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돈과 혁명 앞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큰 자존심을 버려야했다 버릴 수 없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내가 사는 줄 알았다 칼을 들고 내 자존심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자객처럼 자존심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자존심은 늘 웃으면서 산불처럼 되살아났다 어떤 자존심도 도끼로 뿌리까지 내리찍어도 산에 들에 나뭇가지처럼 파랗게 싹이 돋았다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 나의 일생은 이미 눈물로 다 지나가고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죽음의 자존심은 노모처럼 성실히 섬겨야한다 자존심에도 눈이 내리고 꽃이 피는지 겨울새들이 찾아와 맛있게 먹고 가는 산수유 붉은 열매가 달려 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