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의 꽃 / 도종환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비 오고 바람 분다 연꽃 들고 미소짓지 말아라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 버리고 죽어서 허공 된 뒤에 큰 허공과 만나야 비로소 우주이다 백 번 천 번 다시 죽어라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매일 별똥이 지고 어둠 몰려올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24.01.21
겨울 언덕 / 김연동 詩 황덕식 曲 . Ten 안형렬 갈꽃 진 겨울 언덕 바람이 불다 갔다 황혼이 쓸린 그 자리 어둠이 짙어오고 박토의 가슴 위에는 흰눈만이 내린다 가슴을 풀 섶에 놓아 이슬방울 받고 싶은 풀무치 울음 타던 계절도 지나고 우리는 무엇에 젖어 이날들을 울 것인가 눈 덮인 겨울 언덕 낙엽이 흩날린다 별빛이 부서진 자리 찬 서리 가득하고 메마른 가슴 위에는 겨울비가 내린다 푸르른날 그리워지는 이 계절 지나가면 꽃 피고 새가 우는 싱그런 하늘 밑에 우리는 풀잎에 젖어 지난날을 노래하리 듣고 싶은 가곡 2024.01.15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며 텅 빈 해질녁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 길을 간다. 읽고 싶은 시 2024.01.13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 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遂)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모양 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엉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連嶂)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있는 청열(淸烈)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 읽고 싶은 시 2024.01.12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읽고 싶은 시 2024.01.08
1 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읽고 싶은 시 2024.01.06
좋은 때 / 나태주 언제가 좋은 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이 좋은 때라고 대답하겠다 언제나 지금은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햇빛이 쨍한 날 가운데 한 날 언제나 지금은 꽃이 피거나 꽃이 지거나 새가 우는 날 가운데 한 날 읽고 싶은 시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