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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신비 / 구 상

아파트 살이 내 서재 창가에는 몇 안 되는 화분에 끼여 잡초의 화반花盤이 하나 놓여 있다. 저 이름 모를 들풀들은 지지난 해, 봄 국화가 진자리에 제풀에 싹을 터서 제김에 자라 스러지고 나고 하며,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때마다 풀들이 이것저것 바뀌는 것으로 보아서는, 제 자리 흙에서 묻어온 것도 있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들어 온 씨앗도 더러 트는 성 싶다. 나는 난초보다도 또 어느 화분보다도 이 화분을 아끼는데, 저 잡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고향의 들길이나 산기슭이나 바닷가를 거니는 느낌이어서, 한동안이나마 자신이나 세상살이의 번잡에서 해방되며 또 그 조그맣고 가녀린 꽃들을 바라볼 때는 그야말로 ‘솔로몬의 영화榮華’ 보다도 소중하고 진실하고 아름답다는 실감을 지닌다. 더욱이나 저 무명초無名草들이 서..

소외와 불안 / 구상

소외疎外란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어지고 있다. 그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아보면, 타인화他人化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즉 한 인간을 타인을 가지고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생활향상을 위해 만들고 기록한 기계나, 이념이나, 제도나, 조직이 거꾸로 인간 생활을 지배하기에 이르러 도리어 인간을 그 도구나 예속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인간현상을 소외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저러한 인간의 정신이나 정서와 그 과학과 기술의 균형 상실에서 오는 소외현상 보다, 인간이 근원적 차원에서 지닌 소외의식을 좀 살펴볼까 한다. 시인 폴 끌로델은 그의 작품 의 머리말에서, “나는 여기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허청대고 있다. 아지 못할 소외속의 소외자,..

말 알아듣는 고양이 / 윤소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처음엔 세 마리가 어미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며칠 후 주먹만 한 앙증맞고 귀여운 놈들이 더 눈에 띄었다.잘못 보았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같이 있던다른 녀석이 어느새 또 새끼를 낳은 것이다.​마당에 그대로 놓아두고 먹이를 주는 형편이라 녀석들식사 때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다. 녀석들은 눈에띄지 않는 곳에 새끼를 낳아 숨겨 놓았다가, 젖을 뗄무렵이면 자랑이라도 하듯 데리고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열 마리나 되는 녀석들 뒤치다꺼리가 쉽지 않은데, 이제 한꺼번에 일곱 마리가늘어나 고양이 대가족이 되었다. 처음 한 마리를 데려온 지가 사 년 전쯤이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 아랫마을 고모님 댁이었다. 누가 고양이 한 쌍을 차에 실어와 뒷산에내려놓고 가버렸는데 며칠을 굶고 울어대..

소천의 수필 2023.09.30

가을 집짓기 / 홍윤숙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 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 생애 버려뒀던 빈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찿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목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읽고 싶은 시 202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