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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아름다움 / 황동규

인간이 종교 없이도 ‘종교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가 앞으로 인류생존의 열쇠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전 세계가 물신物神 숭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20세기 끝머리인 오늘날 언젠가 한번 기웃거려볼만한 생각이다.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라. 이름 있는 목사치고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몇 있는가? 그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자녀 교육비는 따로 받고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화엄사가 마당을 돌로 깔았다가 다시 벗기는 공사를 했다. 돈이 다른 데로 새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시주받은 돈을 쓰는 데는 종단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부러 돌을 깔았다가 벗긴다는 말도 있었다. 가톨릭 천진암 성지에는 왜 그리 큰 성당을 짓고 있는가? 그곳엔 조그맣고 고졸古拙한 옛 성당을 남기고 서울이..

너무 먼 먼 당신 / 김용택

초승달 저녁 하늘에 걸리고 풀벌레가 밤을 새워 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멀고 저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내게 너무 무겁습니다 금새 질 달 보며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 강에 쉼 없이 흐르는 물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산과 들에 내리는 비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나는 아침 이슬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마음 가장자리에 앉는 눈송이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길 앞에 달빛이고 싶고 잠든 당신의 곁에 머무는 바람이고 싶고 물가에 앉아 물 보는 당신의 그 마음을 거드는 나는 잔 물결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23.09.23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

고요한 마음 / 이해인

시끄럽고 복잡하게 바삐 돌아가는숨찬 나날들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중심을 잡을 수 있는마음의 고요를 키우고 싶습니다. 바쁜 것을 자주 들여다 보지 못해웬지 낯설고 서먹해진 제 자신과도화해할 수 있는 고요함 밖으로 흩어진 마음을안으로 모아 들이는맑고 깊은 고요함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고요한 기다림 속에 익어가는고요한 예술로서의삶을 기대해 봅니다. 마음이 소란하고 산만해 질때마다시성 타고르가 그러한 것처럼저도 "내 마음이여 조용히내 마음이여 조용히"하고기도처럼 고백하고 싶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23.09.18

수선화를 기다리며 / 정호승

수선화가 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겨우내 불을 켜두고 문을 열어둔 채 너무 멀리 나왔다 수선화의 연노란 향기가 수의처럼 나를 감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불을 꺼야 한다 대문을 닫고 우물을 파묻고 고요히 홀로 수선화의 뿌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름다운 인간의 구근이 되어 기다려도 오지않는 봄을 또 기다려야 한다

읽고 싶은 시 2023.09.16

어린 낙타 / 나태주

날마다 네 마음속 어린 낙타 한 마리를 깨워 길을 떠나라 아직은 어린 낙타이니 그의 등에 타지는 말고 옆에 서서 함께 걸어라 낙타가 걸으면 걷고 낙타가 쉬면 쉬고 낙타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서 바라볼 일이다 때로는 낙타가 뜯어먹는 낙타 풀도 먹어야 하겠지만 부디 입술이나 잇몸에서 피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마음속 어린 낙타 한 마리가 너의 스승이며 이웃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길동무임을 잊지 말아라.

읽고 싶은 시 2023.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