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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뒤따르는 강물이앞서가는 강물에게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듯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물결로 출렁걸음을 옮기는 것을그때 강둑위로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저무는 인간의 마음를 향해 가는 것을​그대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가을이 아름다워지고우리 사랑도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그대 사랑이란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사람이 사는 마을에서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구월이 오면구월의..

읽고 싶은 시 2023.09.09

곶감과 수필 /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柹)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

낮은 곳을 향하여 /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가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손 위에 먼저 내린다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바다가 되듯 나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인간이 되는데 나의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태백을 떠나 멀리 낙동강을 따라 흘러가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다

읽고 싶은 시 2023.09.03

지구별의 자장가 / 박노해

밤의 어둠도 무섭지 않았네비바람이 몰아쳐도 두렵지 않았네토닥토닥 자장가 소리가 들려오면나는 아기 곰처럼 평온한 잠이었네 자장자장 우리 아가잘 자거라 우리 아가 지상에서 가장 욕심없는 그 노래를 들으며나는 우주의 숨결 따라 깊은 잠이 들었으나 자장자장 우리 아가잘 자거라 우리 아가 어둠이 오면 지구마을에 작은 불빛 깜박이며집집마다 울려오는 자장가 소리 눈물도 자장자장배고픔도 자장자장총성도 자장자장두려움도 자장자장 어두운 지상에 가장 오래된 노래여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 같은 노래여오 우리들 눈물 어린 평화의 노래여

읽고 싶은 시 2023.08.31

손 / 반숙자

심부름 꾼이다. 좋은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 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