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말 알아듣는 고양이 / 윤소천

윤소천 2023. 9. 30. 09:40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처음엔 세 마리가 어미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며칠 후 주먹만 한 앙증맞고 귀여운 놈들이 몇 녀석 더 눈에 띄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같이 있던 다른 녀석이 어느 사이 또

새끼를 낳은 것이다. 마당에 그대로 놓아두고 먹이를 주는 형편이라

아침저녁 녀석들 식사 때나 모두의 얼굴을 보게 된다. 녀석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새끼를 낳아 숨겨 놓았다가 젖을 뗄 무렵이 되면 자랑이라도 하듯

데리고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열 마리나 되는 녀석들 뒤치다꺼리에 신경이

쓰이는데, 이제 한꺼번에 일곱 마리가 늘어나 고양이 대가족이 되었다.

 

처음 한 마리를 데려온 지가 사 년 전쯤이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 아래 마을 고모님 댁이었다. 누가 고양이 한 쌍을 차에 싣고 와 뒷산에

내려놓고 가버렸는데, 며칠을 굶고 울어대다 가까운 인가를 찾아

내려온 고양이였다. 졸지에 산목숨을 떠맡게 된 고모님은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거두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은 감당하기 힘겹다하시어

수놈을 맡아온 것이다. 데리러 가서 녀석과 첫 상면을 하였다.

갈색목걸이에 검은 융단으로 된 목타이를 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하면

결혼식장에서나 보는 예복 차림이었다. 윤기가 자르르한 잿빛 바탕에 하얀 점이

적당히 박혀있는 모피, 균형 잡힌 몸매에 얼굴이 여느 고양이 보다

순박한 모습이어서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한눈에 호감이 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브리티시 쇼트헤어’라는 종이었다.

 

데려와 마침 비어있는 개집에 목줄을 달아 매어놓았는데 집에 들른

큰애가 한참을 쓰다듬으며 놀아주다가 녀석의 사진을 몇 장 찍어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는데,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더니 어느 눈

밝은 네티즌이 보고 ‘고양이가 아니라 개양이네요’라는 댓글을 달았다며

목줄을 풀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고양이를 매어 놓은 것이

찜찜했던 참에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싶어

곧바로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그리고 한 참이 지났는데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녀석이 그 사이 장가를 들어 제 녀석하고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호랑이 줄무늬를 두른 와일드하게 보이는 색시를 보란듯이 데리고

온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지, 그래 짝 만나 장가들었구나.”하면서

축하해주었는데, 바로 새끼를 낳아 집을 지어주고 먹이를 챙겨주어야

했다. 수놈과 달리 암놈은 안방마님이 되어 자리를 잡고 줄곧 머물면서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귀여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것이 두 배 세 배를 낳아

순식간에 열 마리가 되자 뜰이 고양이 마당이 되어버려, 아뿔싸

이제는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어느 날부터 먹이를 주면서 '너희들과 한집에 살게

되었지만, 서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 집도 새로 지어주고

하겠지만, 네 놈들 그 고약한 똥은 감당할 수가 없다. 이후로는

밖에 나가 해결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알았지!' 하며

나직이 몇 차례 타일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신통하게도

녀석들 질서가 서서히 잡혀가는 것 같았다. 말 알아듣는 나무이야기는

있지만, 육식성인 녀석들에게 기대하지는 않고 궁여지책으로

내린 처방인데, 어느 사이 이심전심이 되었는지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는

듯 했다. 이를 지켜보던 노모는 '그놈들 참, 사람 못된 놈보다 낫다.'

하시며 모처럼 칭찬을 했다. 그보다 다행인 것은 고양이 마당이 된 뜰을

볼 때마다 “저놈들이 또......”하면서 고양이를 데려온 나를

책망하는 듯한 아내에게 그나마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백지위에 집 모양을 그린 다음, 제재소에서 목재를 켜고

남아 화목으로 쓰는 피죽을 골라 서툰 솜씨로 난생처음 소나무 아래에

제법 큰 고양이집을 지었다. 지어놓고 보니 처마가 짧다. 물을

싫어하는 녀석들인지라 다시 지붕을 덧대어 길게 내고 문도 하나 더

내어 들락거리기 쉽게 했다. 어느새 새집에 들어앉은 어미

품에 새끼들이 서로 포개어 안겨있다. 꼼지락거리며 어미젖을 먹고

있는 새끼들을 보고 있으면 저 순간만은 녀석들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해 보였다.

 

잠을 즐기는 녀석들은 한낮이면 나무 그늘에 몸을 서로 포개어

배를 드러내고 길게 누워, 복잡한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어, 아예 잊고

산다는 듯이 한껏 늘어져 낮잠을 잔다. 그러다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웬만한 일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몸을 누인다.

잘 만큼 자고 일어나면 몸을 늘여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몸을

부르르 떤 다음 서서히 발걸음을 떼는데, 걸음걸이가

느릿느릿 유유자적하면서도 거침이 없어 당당한 위엄이 느껴진다.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자존심이 강한 녀석들은 맛있는

먹이를 주며 불러도 오지 않고, 자기가 오고 싶어야 천천히 다가온다.

어느 날은 녀석이 양지바른 창가에 눈을 감고 앉아 바람결에

털을 스르르 날리고 있었는데, 이 모습이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고매한

학자처럼 우아하게 보였다. 녀석은 타고난 동물적 감각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고 있는지, 내 마음을 곧잘 읽어내는 것 같다. 이렇게 영리한

녀석인지라 제 식구들을 잘 챙겨내는 지혜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 한국수필.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