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3

봄 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19.07.23

신령한 새싹 / 구 상

그다지 모질던 회오리바람이 자고 나의 안에는 신령한 새싹이 움텄다. 겨울 아카시아모양 메마른 앙상한 나의 오관(五官)에 이 어쩐 싱그러움이냐? 어둠으로 감싸여 있던 만물들이 저마다 총총한 별이 되어 반짝이고 그물코처럼 엉키고 설킨 사리(事理)들이 타래실처럼 술술 풀린다. 이제 나에게는 나고 스러지는 것이 하나도 가엾지가 않고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고 신경통으로 사지(四肢)가 쑤시기는 매한가지지만 나의 안에는 신령한 새싹이 움터 영원의 동산에다 피울 새 꽃을 마련하고 있다.

읽고 싶은 시 2019.07.16

침 묵 / 이해인

맑고 깊으면 차가워도 아름답네 침묵이란 우물 앞에 혼자 서보자 자꾸자꾸 안을 들여다보면 먼 길 돌아 집으로 온 나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이끼 낀 돌층계에서 오래오래 나를 기다려온 하느님의 기쁨도 찰랑이고 "잘못 쓴 시간들은 사랑으로 고치면 돼요" 속삭이는 이웃들이 내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고마움에 할 말을 잊은 나의 눈물도 동그랗게 반짝이네 말을 많이 해서 죄를 많이 지었던 날들 잠시 잊어버리고 맑음으로 맑음으로 깊어지고 싶으면 오늘도 고요히 침묵이란 우물 앞에 서자

읽고 싶은 시 2019.07.10

바 다 새 / 이해인

이 땅의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식히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읽고 싶은 시 2019.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