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벼는 한여름
이글거리는 땡볕에 폭우와 태풍을
이겨내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익어 열매를 맺는다.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달관한 성인의 겸양을 보는
듯하다. 사람은 육십이 넘으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
처럼 익어간다고 한다. 우리
삶도 꽃이 피고 지면서 열매를
맺고 시련 속에 익어가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얼마 전 적도를 두 번
돌고 오는 여정에서 만들어지는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바이킹의 후예가 만든
노르웨이의 리니아아쿠아비트
LinieAquavit라는 술인데,
오크통에 담겨 적도Linie를
돌아오는 항해를 통해 숙성된다.
술병에는 노르웨이의 지도와
배가 그려져 있고 그때그때의
항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바다의 기상 상태에 따라
술맛이 다르다고 한다. 북유럽
대표 명주名酒로 이 주조
방식대로 200여 년의 오랜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보드카
종류로 축제 때 주로 마시는데
도수가 높아 차갑게 식힌
작은 유리잔을 사용한다.
한 주조업자가 배에 술을
가득 싣고 호주를 향하던 중,
강한 태풍을 만나 술통이 모두
깨져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실의에 빠져있다가 남아있는
술 한 통을 발견하고 마셨는데,
술맛이 원래의 술보다 좋았다.
그는 돌아와 이 술맛을 재현하기
위해 여러 환경을 만들어보았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라는 조언을
하였는데,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면서 이 술이 탄생했다.
적도를 돌아오는 힘든 항해를
통해 오묘한 술이 탄생하듯, 시련을
잘 견디고 이겨내면 새로운
삶이 열리는 것이 인생이다. 고난은
우리를 단련해 참고 일어서는
지혜를 준다. 무엇을 이루려 할 때
역경은 오히려 새로 출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는 산고産苦를 통해
태어난다. 나무는 늦가을 무서리에
나목이 되고, 차가운 눈을
맞으며 꽃샘추위를 이겨내 봄을
맞는다. 우리가 매화를 좋아하는
것은, 추위를 이겨내고 눈 속에서
꽃피운 향이 고매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종심從心에 이른
나를 본다. 지난 시절의 고뇌와
방황을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오곤 한다.
설 익어 어설픈 사랑은 그만큼
쓰고 아프다. 그 시절의 아픔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평탄한 삶에서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추사
秋史의 세한도歲寒圖는
유리안치의 고난 속에 탄생했다.
적도를 돌고 온 아쿠아비트는
적도의 풍랑에 흔들리면서
뒤섞이고, 고요한 물결에
잠재우며 자연스럽게 숙성된
술이다.
( 2023. 한국수필 )
'소천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수업료 / 윤소천 (2) | 2024.09.18 |
---|---|
차를 마시며 / 윤소천 (1) | 2024.09.16 |
진달래 고개 / 윤소천 (1) | 2023.11.23 |
말 알아듣는 고양이 / 윤소천 (0) | 2023.09.30 |
오월의 향기 / 윤소천 (0) | 202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