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적도를 돌고 온 술 / 윤소천

윤소천 2024. 2. 26. 11:34

 

 

 

 

가을이 깊어간다. 벼는 한여름

이글거리는 땡볕에 폭우와 태풍을 견뎌내고 따가운

가을 햇볕에 익어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달관한 성인의 겸양을 보는 듯하다.

사람은 육십이 넘으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익어간다고 한다. 좋은 술이 되려면 오랜

숙성이 필요하듯, 우리 삶도 꽃이 피고 지면서

열매를 맺고 시련을 통해 익어가며 용광로에서

금속이 제련되듯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얼마 전 적도를 두 번 돌고 오는 여정을 거쳐

만들어진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바이킹이 만든 노르웨이의 리니아아쿠아비트

LinieAquavit라는 술인데, 오크통에 담겨 적도Linie 를 돌아오는

항해를 통해 숙성되면서 만들어진다. 술병에는 노르웨이의

지도와 배가 그려져 있고 그때그때의 항로가 기록되어 있는데,

바다의 기상 상태와 기후변화에 따라 술맛이 다르다 한다.

이 술은 보드카 종류의 북유럽 대표 명주名酒인데, 이 주조

방식대로 200여 년의 오랜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주로 축제 때 많이 마시고 도수가 높아 차갑게

식힌작은 유리잔을 사용한다.

 

한 주조업자가 배에 술을 가득 싣고 호주를 향하던 중,

강한 태풍을 만나 술통이 모두 깨지며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실의에 빠져있다가 남아있는 술 한 통을 발견하고

마셨는데 그 술맛이 원래의 술보다 더 좋았다. 그는 이 술맛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한 친구가

항해 여정부터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하여, 적도를 넘어온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면서 이 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비슷한 여러 환경을 만들어보아도 파도와 온도

차에서 자연스럽게 숙성된 무색무취하며 깊고 오묘한

술맛을 따라가지 못했다 한다. 

 

용광로와 같은 적도를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오묘한 술이 탄생하듯, 우리 인생도 고난과 시련을 잘

견디고 이겨내면 새로운 삶이 열린다. 역경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무엇을 이루려 할 때 역경은 오히려

절호의 찬스가 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는 산고産苦를

통해 태어난다. 나무는 늦가을 무서리에 자지러져

나목이 되고, 추위에 눈을 맞으면서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는다.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것은, 추위를

견디어내고 눈 속에서 꽃피운 향이 고매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종심從心에 이른 나를 본다. 지난

시절의 고뇌와 방황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올 때가 있다. 문득, 내 안에 고인 눈물은

지난 세월의 회한이겠지만 결국 진리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설 익어 어설픈 사랑은

그만큼 쓰고 아프다. 

 

우리는 시련과 역경을 통해 지혜와

겸손을 배우며 성숙한다. 평탄한 삶에서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가 탄생했다. 적도를

돌고 온 아쿠아비트(Aquavit)는 적도의 풍랑

속에 흔들리고 뒤섞이며 고요한 물결에

잠재우면서 자연스럽게 숙성된 술이다. 

 

( 2023.  한국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