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가슴만 남은 솟대, 책 머리에 / 윤소천

윤소천 2025. 3. 11. 07:28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 지나온 길 돌아보면, 꿈결처럼

아득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 온다.

서리맞아 희끗한 머리카락, 어느새

반생을 훌쩍 넘어 종심從心에 서 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절,

무지와 오욕의 늪을 헤매던 여름 골짜기, 

어두운 밤길 별빛만 바라보고 숨이

턱에 차 걷던 고갯길들, 늦가을 무서리에

자지러진 산마루는 바람마저 드세었다.

그리고 한겨울 눈 내리고 내려, 잠 속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먼 길 돌아와, 이제 봄이 오는

길목에 바람 잔 들길, 자연에 몸을

맡기고 침묵의 겨울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개안開眼한 내가 봄의

길목에 서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소박한 빵과

스프를 앞에 두고 감사 기도 드리는

노인의 그림이 놓여 있다. 나는 

그림을 볼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 경건해진다. 행복해지려면 

감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제야 감사를 알면서

철이 드는 것 같다. 

 

내게 필명을 주시여 늦게나마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해 준 한메

선생님, 글눈을 틔워주시고

수필의 맛을 알게 해 준 서전瑞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어려움 중에 사랑과 인내로

묵묵히 지켜보아 준 아내와 가족들에

감사하며, 부모님과 나를 애지중지

길러주신 할머니 영전에

글을 바친다. 

 

실존의 AI 시대, 우리는 길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되새기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2024. 가을에,  윤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