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무등산(無等山) / 윤소천

윤소천 2022. 7. 31. 06:07

 

 

 

빛고을 광주(光州)를 안고 있는 무등산은 인근의 담양 나주

화순 장성,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자애롭고 든든한 모습이다.

무등(無等)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만물이

평등하다는 하늘의 섭리를 보여준다. 부드러운 무등의 능선은

푸른 하늘에 욕심 없이 그어놓은 한 가닥 선(線)이다.

 

나는 무등산 아래 빛고을 유동(柳洞), 버들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품에서 포근했던 유년시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탱자 울 너머로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시내에 첫눈이 온다는 어머니의

말에 무등산에 하얀 눈이 내린 아침이면, 누나는 일찍

일어나 ‘눈 왔다. 무등산에 눈 왔어.’하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마루로 나와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학창시절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무등산은 저 멀리서 먼저 두 팔을 벌려

어머니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날은 그 무엇에 쫓기면서 건성으로 보낸

철없는 시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산 아래 살면서

무등을 잊고 지냈다. 돌아보면 어리석은 헛된

욕망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본연(本然)의 나로 돌아와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에 눈을 뜬 것 같다.

 

무등은 석가모니가 히말라야 설산 보리수

아래에서 육년 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이 무등정각(無等正覺)

이라 해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무등산이

성산(聖山)임을 안 것은 이순(耳順)을 넘어서였다. 승(僧)과

속(俗)을 넘어 서서,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무애(無碍)의

삶을 살다 간 원효(元曉)를 알고 나서였다.

주봉인 천왕봉과 서석대와 의상봉을 마주보고 서있는

원효봉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무등의 능선을 그대로 닮았다.

원효봉 아래 원효사(元曉寺)는 내가 자주 찾는 곳인데, 

오르는 길이 편안하면서 고즈넉해 사색에 젖게 한다. 달 밝은

밤이면 푸른 달빛과 어스름한 숲이 한데 어우러져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분해진다. 이 길은 나를 명상으로 이끄는

담담(淡淡)한 심상(心想)의 길이다.

 

엊그제는 봄이 돋는다는 입춘(立春), 무등산에

봄눈이 내렸다. 눈을 맞으며 오른 무등, 천왕봉(天王峰))과

지왕봉(地王峰) 인왕봉 (人王峰) 그리고 서석대(瑞石臺)의

설경(雪景)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수정병풍이라 불리는

서석대의 산철쭉에 핀 상고대와 눈꽃은 환상적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상고대는 크리스탈처럼 빛나고, 군락을 이룬

철쭉의 눈꽃은 하늘의 꽃인 양 황홀했다. 눈꽃

속에서 나의 가슴은 환희로 벅차올랐다.

 

눈이 쌓인 봉우리들이 파란 하늘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무등산의 모습은 성스러우면서 장엄하다.

이 무등의 성스러운 빛은 무등을 딛고 무상(無常)을

넘어 어둠과 밝음을 초월한 빛이다. 속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빛이다.

화광동진은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인데 ‘깊은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범속함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이는 깊은 깨달음에 이른 경지로, 자신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세속에 겸허하게 묻혀

사는 거사(居士)의 모습이다.

 

무등, 그대로의 의미는 때 묻지 않고 순박하여

걸림이 없는 자연 그대로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동심(童心)의 세계이다. 이 보이지 않는

장엄하면서 성스러운 무등의 빛이 빛고을을 비추고

있다. 무등산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는 어버이와 같은 성산(聖山)이다.

 

 

눈 덮인 무등산(無等山)

바람 잔 산정(山頂)

성스러운 설봉(雪峯)

선정(禪定)의 정경(情景)이여!

 

천왕봉 원효봉 서석대 입석대

품어 안은 무등(無等)

어머니 품처럼 깊고 포근하다

무등(無等)의 무애(無㝵)를 넘어

맑게 트인 하늘

저녁 노을이 곱다

 

지난 가을 산마루

무서리에 자지러진 나목(裸木)

눈 내리고 내려

기다림마저 잊혀진 봄

허무(虛無)를 넘어서

찬연(粲然)한 햇살에

눈부시어 눈 부비며

 맞은 새봄

 

화엄(華嚴) 열리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새 아침

우리

부활(復活)의 화관(花冠)쓰고

환희로 피어나자

 

( 2022. 한국수필 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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