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싱그러운 아침 / 윤소천

윤소천 2013. 11. 19. 19:04

 

창밖의 공기가 산뜻하게

느껴지는 9월의 아침이다. 잠에서

깨면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촛불 위로 향이

번지면 예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진다.

 

아침이면 처음 만나는

것이 길 건너 대숲에 둥지를 튼

새들이다. 새들은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어느새 지저귀고

있다.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즐겁고 맑은

새소리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뜰에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와 옥잠화 구절초

백일홍이 한창이고

연못의 연꽃은 마지막 꽃을

피우고 있다. 무더위와 태풍을

이겨내고 맑은 이슬을

머금고 저마다 피어 있는

싱그러운 아침이다. 꽃은 도심의

공원이나 깊은 산 계곡, 농촌

마을이나 외딴 섬 아무 데나

자리를 잡으면 이물없이

철따라 피고 진다.

 

전원시인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 <폭우가 지나간 뒤의 꽃>

에서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

적이 우리를 삼키지 않았다 /

이 광경을 보자 나는 기억이

난다 / 어두운 삶의 충동에서

보낸 숱한 시간들이 / 어둠과

궁핍에서 벗어나 자신을

추스르고 / 감사와 사랑으로

온화한 빛을 향하던 때가"

하고 노래했다.

 

동양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헤세는 중년이 되자

한적한 시골에서 밀집 모자를

쓴 소박한 모습으로 살았다.

자연에서 정원을 가꾸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헤세의

시를 읽다보면, 숱한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절망에서 희망을

찾고, 자신을 추스르는

지혜를 얻어 자연과 하나되는

경지가 느껴진다.

 

지상의 생명들은 하늘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주어진

환경에서 자연스레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문명의 덫에 걸려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

의미 있고 성공한 인생이다.

존재는 살아있는 현재의

시간이다. 일상의 틀에 갇혀

살다 보면 관습에 젖어 삶은

깨어있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이 아침, 뜰에 나와

꽃들과 눈을 맞추고 인사하면

마음이 싱그러워 가벼워진다.

푸른 나무와 꽃을 닮고,

새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날고 싶은 아침이다. 

 

(무등수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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