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가을 뜨락에서 / 윤소천

윤소천 2015. 12. 6. 22:46

 

상강霜降이 가까워지면서 엊그제는

첫서리가 내렸다. 이른 아침 차를 운행하러

나왔다가 창유리에 낀 성에를 긁어내는데

손가락이 얼얼하게 시려왔다. 오후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증암천 수변 공원에 차를

세우고 갈대밭 길을 걷다 코스모스 달맞이꽃

씨앗을 받아왔다. 그리고 집 마당의 봉선화

분꽃 금잔화 백일홍 씨앗을 받아 각기 봉투에

넣어 올해 꽃씨를 갈무리했다.

 

마당 모퉁이에 서 있는 해바라기는 까만

씨앗을 품고 자신의 무게에 고개를 숙였다.

해바라기를 볼 때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온몸으로 태우다 간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가

죽지않고 장년의 내 나이가 되었다면 어떤

해바라기를 그렸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자

가을 햇살을 묵묵히 받으며 인생을 달관한

성숙한 모습으로 고개 숙이고 서

있는 해바라기가 떠올랐다.

 

땀 흘린 보람으로 가을걷이를 끝낸

빈 들녘은 소임을 다한 충만함에 평안平安이

느껴진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타성적으로 살다 보면, 오히려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보일 것이다.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현대를 살아가려면, 새로운

가치관과 지혜가 필요하다. 현대 문명에

새 시대를 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존의 사상을 해체하고 재해석

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실존實存의

자기를 지키는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는 신은 도덕적 이상이나 관념적

존재가 아니고, 각자의 마음에 주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진리의

자유로움으로 삶을 긍정하는 의미를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超人’

이라 했다. 우리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는 무상無常를 넘어서 순간순간

깨어나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따가운 햇볕에 익어 여문 씨앗들은

가을의 청정한 기운을 받아들이며 계절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꽃씨 한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명의 신비가 느껴진다. 이제 무서리에

낙엽 지고 눈이 내리면 지상의 것들은

침묵의 계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묵묵히 다시 올 새봄을 기다린다.

한 알의 견실한 씨앗에게서 새로운

순환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생명의

질서와 지혜를 배운다.

 

(무등수필, 2015.)

 

'소천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실을 따며 / 윤소천  (0) 2016.06.30
가슴만 남은 솟대 / 윤소천  (0) 2016.06.26
겨울 이야기 / 윤소천  (0) 2013.11.22
어머니의 젖가슴 / 윤소천  (0) 2013.11.22
무순 언니 / 윤소천  (0) 2013.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