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상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 정호승

윤소천 2022. 8. 10. 18:40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자기만의 십자가를 하나씩은 지고 살아갑니다.

“저 녀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할 십자가야.” 이렇게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모에게는 자식이 십자가입니다. “저이는 내

십자가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아내에게는

남편이 십자가입니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사랑보다 고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나 죽을 때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대로

버리고 싶으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고통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 자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청년 예수의 고통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의 고통은 영상을

통해 이미 실재 장면처럼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란 고통의 상징이자 은유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놈은 내 십자가야.”하고 말했을 때, 그 십자가가 바로 내 고통의 원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의 고통만 생각하지 고통의 의미와 가치는 외면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주어진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전제되어 있는데도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고통과 동시에 사랑의 의미와

가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사랑의 의미보다는 고통의 의미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면 무조건 거부하거나 체념하고 등에 지고 가야할 운명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하고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고통의 바위, 징벌의

험산이라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겁고 힘에 부쳐 다른 사람이 대신 좀 지고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아플 때 누가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누가 대신 지고 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강대에 계신 송봉모 신부님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말고 품에

안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등에 지고 가거나 땅에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정히 품에 안고 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등에 지고 가니까 힘이 든다는 겁니다.

등에 무거운 것을 고통스럽게 지고 가는 것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품에 안고

가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기 의지와 인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저는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거부하려고 애쓰지

말고 공손히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왕 자기 십자가를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면 등에 지고 가는 것보다 품에 안고 가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젖을 먹일 때 아기를 품에 안고 먹이는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젖을 먹이는 아이와 같이 귀한 존재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십자가든 큰 십자가든 십자가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보다 더 작고 가볍다고 느낍니다.

저도 다른 사람처럼 좀 가벼운 십자가를 지닐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헛된 일입니다.

 

한 학자가 불만에 찬 어조로 하느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요르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르단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느님은 그 학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지가의 무게를 달아 보아라.”

학자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같았습니다.

학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하느님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 우화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우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자기 십자가가 진정 무엇인지 먼저 깨닫는 일이 퍽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 우리들의 십자가일까요?

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십자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도 주지만 기쁜 만큼 고통도 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쁨보다 고통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쩌면 제 어머니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팔순이 넘은 제 어머니는

아직도 저를 위해, 철없는 제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십니다.

 저는 어쩌면 제 아내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부부는 악연이라는데, 제 아내는

저와 맺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하고...

저는 제 자신이 바로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됩니다.

제 속엔 제가 원하지 않은 제 자신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많은 제 자신이

모두 저의 십자가입니다. 제 자신만큼 저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나’라는 십자가를 품에 안고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