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가슴만 남은 솟대 - 책 머리에 / 윤소천

윤소천 2024. 11. 23. 08:54

 

사랑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 지나온 길 돌아보면,

꿈결처럼 아득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 오고는 한다.

서리맞아 희끗한 머리카락,

어느새 반생을 훌쩍 넘어

종심從心에 서 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절.

무지와 오욕의 늪을 헤매던 여름

골짜기, 어두운 밤길 별빛만

바라보고 숨이 턱에 차 걷던

고갯길들. 늦가을 무서리에

자지러진 산마루는 바람마저

드세었다. 그리고 한겨울 눈

내리고 내려, 잠속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먼 길 돌아와, 이제 봄이

오는 길목의 바람 잔 들길.

자연에 몸을 맡기고

침묵의 겨울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개안開眼한 내가

봄의 길목에 서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소박한

빵과 스프를 앞에 두고 감사

기도드리는 노인의 그림이

놓여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

경건해진다. 행복하려면

감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야 감사를 알면서

철이 드는 것 같다.

 

내게 필명을 주시어

늦게나마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해 준 한메 선생님,

글눈을 틔워주시고 수필을

알게해 준 서전瑞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사랑과 인내로 묵묵히 지켜

보아준 아내와 가족들에게

감사하며, 부모님과 나를

애지중지 길러주신 할머니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

 

실존의 AI 시대, 우리는

길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정행검덕

精行儉德의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2024. 가을에 윤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