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귀 로 8 / 홍윤숙

윤소천 2015. 2. 19. 08:03

 

 

 

 

귀    로   8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아"*

이제 그대 할 일은 고개 숙여 묵묵히

먼 데서 그대 이름 부를 날을 기다리는 일이다

근심하지 말고 날마다 가던 길 담담하게 가며

밤이 와도 아무도 문 열고 돌아올

사람 없는 적막에도 길들고

바람 불면 억새처럼 순하게 등뼈도 휘어지며

유리에 살 베어도 소리치지 마라

네 가슴 반은 이미 바람이 되어 버린

텅 빈 공동(空洞), 그게 너의 집인 것을

너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수만 리 걸어온 등 뒤의 길이 한 폭의 화폭으로 떠오르는

거기, 까-맣-게 살아나는 고향의 마을 길

뒤뜰에 복사꽃 환희 피던 봄날

마루 아래 댓돌 위 하얀 고무신 벗어 놓고

겁 없이 떠나왔던 수십 년 타관의 거리들을

이제 그림자 하나 앞세우고 돌아가는

남은 길의 거리(距離)를 가슴으로 재어 본다

사람아, 기쁨으로 그 길 걸어가고

덤으로 얻은 시간 감사하라

 

한 생애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이 은혜......

 

 * < 티벳 사자의 서 >에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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