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귀 로 7 / 홍윤숙

윤소천 2015. 2. 16. 09:12

 

 

 

귀   로  7

 

 

 

 

 

 

 

 

오늘 하루를 걸어서

여기까지 왔

 

키 큰 석양이

금박(金箔)의 무거운 성서를 들고

가로수에 기대어

바람의 연음부(連音符)로

긴 옷자락 펄럭이며 서 있는

투명한 생의 한때

 

긴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가는

황혼의 한없이 깊어지는 눈길 가슴으로 지하(地下)로

내려가는, 비로소 하루의 꿈에서 깨어나는 시간

세기를 넘어 걸어가는 젊은 날의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뒷모습 같은 노을 속으로 들어서면

골목 안 가로등에 등불 켜진다

 

나는 이 도시에서 칠십 년 넘게 긴 꿈을 꾸었고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낯선 나라로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한 생애 걸어서 당도한

지상의 황혼이 새삼 아름다워

들끓는 여름 들과 몇 개의 산맥을 소리 없이 넘어온

황혼이 아름다워

손 놓고 노을 속에 묵연히 서 있다

돌아갈 길도 잊어버리고

 

'읽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 로 9 / 홍윤숙  (0) 2015.02.23
귀 로 8 / 홍윤숙  (0) 2015.02.19
귀 로 6 / 홍윤숙  (0) 2015.02.12
소 금 강 / 나석중  (0) 2015.02.11
괜 찮 다 / 나석중  (0) 2015.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