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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 짚 / 전석홍

누이야 너는 아느냐 벼 줄기가 부르튼 발 물에 담그고 쏟아지는 뙤약볕 모진 비바람 속 진국 다 빨려 이삭 하나 키워 낸다는 것을, 때론 헉헉 숨 막히는 가뭄 속에서 발바닥 쩍쩍 가라지고 손가락 타오르면서도 물 한 방울 찾아 발가락 굳은 땅속 파 들어가는 것을, 이삭이 익어 가면 멍애처럼 무거워 무거워서 조용히 모개 꺽고 휘어 내리는 것을 가슬이 끝나면 알곡 다 털리고 상흔처럼 이삭 자국만 녹슨 훈장으로 간직한 채 세월의 주름살같이 메말라버린 지푸라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지금은 이엉되어 우리 집 초가지붕 포근히 덮어 주는데 어릴 적 "한 알의 밥톨에 뼈 빠진 땀 얼마나 담긴 줄 아냐 이눔들아 한 톨도 버려선 안돼!" 타이르신 말씀 오늘도 십계명처럼 목구멍에 걸린다

읽고 싶은 시 2023.01.25

그때 알았네 / 전석홍

뜬구름 잡으로 온 세상 산과 들 한참 쏘다닌 적 있었네 가야 할 길 내 길 저만치 접어 두고 그때 알았네, 삶은 때로 낭비도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나를 이기지 못하고 타오르는 감정의 수렁 깊이 빠져 허우적거린 적도 많았네 그때 알았네, 삶은 때로 낭패의 길이기도 한 것을 할 일 눈앞에 쌓아 두고 손발 묶어 둔 채 머리로만 요리저리 헤아린 적도 있었네 그때 겨우 알았네, 삶은 때로 정지도 있다는 것을 두 다리 대지에 굳건히 디디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정진의 길임을 비로소 그때 알았네

읽고 싶은 시 2023.01.13

원점에 서서 / 전석홍

어느새 출발 지점 다시 돌아왔구나 땅과 하늘 길 굽이굽이 바람서리 이겨내면서 마음호수 잔잔하다 겨루어야 할 일도 안개 속 헤매야 할 일도 의자 다툼마저 이제 없다 파아란 하늘이 마음속 빈자리 가득 메우고 있을 뿐 아지 못한 채 오래 끼고 다녔던 색안경이 사라지고 산과 들, 사람, 정치 뜨락도 있는 그대로 보이는구나 스쳐가는 자연 바람만 상쾌하다

읽고 싶은 시 2023.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