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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 / 오세영

​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읽고 싶은 시 2023.06.02

백발의 왕버들 / 윤소천

입춘 지난 어느 날, 온종일 함박눈이 내리는데 나는 무등산(無等山) 자락 충효마을 앞을 지나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데왕버들은 어느새 연둣빛 움을 틔우며 봄을 알리고 있었다.여기에 춘설이 내려 왕버들 가지에 흠뻑 쌓였는데이 모습이 장엄(莊嚴)하고 신령스러워 그 앞을 그저지나기가 쉽지 않게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무등산 정기를 받고 자란 김덕령 장군은 어릴 적부터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잡은 장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문무를 갖춘 젊은 의병장으로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해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그런데 장군의 전공을 시기한 무리들이 이몽학의 반란에연루되었다는 모함을 하여 신하들의 간곡한 상소에도불구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다. 충무공(忠武公)이순신을 파..

소천의 수필 2023.05.20

제비꽃에 대하여 / 안도현

​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간다 ​ 제비꽃에 대해 알기위해서 따로 책을뒤적여 공부할필요가 없지 ​ 연인과 들길을걸을때 잊지않는다면 발견할수있을거야 ​ 그래,허리를 낮출줄 아는사람에게만 보이는거야 자줏빛이지 ​ 자줏빛을 톡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 사랑이란그런거야 사랑이란 그런거야 ​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법이 없단다 ​ 그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가거든 ​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읽고 싶은 시 2023.04.29

그 분이 홀로서 가듯 / 구 상

​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이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읽고 싶은 시 2023.04.19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 구 상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 이 욕망과 고통의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읽고 싶은 시 2023.04.12

4 월 / 오세영

​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이 거기 있어라, 젊은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뜨면 문득 너는 한송이 목련인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가슴 울리던 격정은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읽고 싶은 시 2023.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