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낙타 / 나태주 날마다 네 마음속 어린 낙타 한 마리를 깨워 길을 떠나라 아직은 어린 낙타이니 그의 등에 타지는 말고 옆에 서서 함께 걸어라 낙타가 걸으면 걷고 낙타가 쉬면 쉬고 낙타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서 바라볼 일이다 때로는 낙타가 뜯어먹는 낙타 풀도 먹어야 하겠지만 부디 입술이나 잇몸에서 피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마음속 어린 낙타 한 마리가 너의 스승이며 이웃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길동무임을 잊지 말아라. 읽고 싶은 시 2023.09.16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뒤따르는 강물이앞서가는 강물에게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듯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물결로 출렁걸음을 옮기는 것을그때 강둑위로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저무는 인간의 마음를 향해 가는 것을그대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가을이 아름다워지고우리 사랑도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그대 사랑이란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사람이 사는 마을에서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구월이 오면구월의.. 읽고 싶은 시 2023.09.09
낮은 곳을 향하여 /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가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손 위에 먼저 내린다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바다가 되듯 나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인간이 되는데 나의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태백을 떠나 멀리 낙동강을 따라 흘러가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다 읽고 싶은 시 2023.09.03
지구별의 자장가 / 박노해 밤의 어둠도 무섭지 않았네 비바람이 몰아쳐도 두렵지 않았네 토닥토닥 자장가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아기 곰처럼 평온한 잠이었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 자거라 우리 아가 지상에서 가장 욕심없는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우주의 숨결 따라 깊은 잠이 들었으나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 자거라 우리 아가 어둠이 오면 지구마을에 작은 불빛 깜박이며 집집마다 울려오는 자장가 소리 눈물도 자장자장 배고픔도 자장자장 총성도 자장자장 두려움도 자장자장 어두운 지상에 가장 오래된 노래여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 같은 노래여 오 우리들 눈물 어린 평화의 노래여 읽고 싶은 시 2023.08.31
첫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 박노해 그냥 걸어라 첫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그냥 걸어라 상처도 두려움도 모르는 아이처럼 그냥 걸어라 금기도 허락도 모르는 아이처럼 걷다 넘어지면 울고 울다 일어나 다시 걸어라 걸어오는 길들이 너를 이끌어주고 여정의 놀라움이 너를 맞아주리니 네 영혼이 부르는 길을 그냥 걸어라 읽고 싶은 시 2023.08.27
나팔꽃 / 나태주 담벼락 가파른 절벽을 벌벌 떨며 기어올라간 나팔꽃의 덩굴손이 꽃을 피웠다 눈부시다 성스럽다 나팔꽃은 하루 한나절을 피었다가 꼬질꼬질 배틀려 떨어지는 꽃 저녁 때 시들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아침 자취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빈 자리 그 어떤 덩굴손이나 이파리도 비껴서 갔다 나팔꽃 진 자리 더욱 눈부시다 성스럽다 가득하다 읽고 싶은 시 2023.08.20
아름다운 회향 / 공광규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 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 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읽고 싶은 시 2023.08.17
마음의 구멍 / 구 상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원과 맞닿아서 공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서 제 모습을 하고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나는 나의 불멸을 실감하면서 삶의 덧없음이 오히려 소중해지며 더없이 행복하구나 읽고 싶은 시 2023.08.14
나팔꽃 / 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23.08.14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이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읽고 싶은 시 202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