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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이... / 김수봉

한동안 연락이 뜸해진 친구에게 전화를 넣어봤다. “뭐 하고 지내는가?” 한참을 미루적거리더니, “으음 저..., 발바닥 껍질 뜯고 앉아 있네.” 무료하게 지내고 있다는 응답치고는 어지간히 걸작이었다. 직장 정년퇴임을 하고도 몇 년이 됐으니 출근에 바쁠 일도, 허구한 날 친구를 만나 노닥거릴 ‘껀수’도 없을 테니 집에 앉아 있으면 멋쩍은 사람이 되어 발바닥이나 문지르다가 껍질을 뜯어내는 버릇이 생겼음이리라. 이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별 다를 게 없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신체 세포의 성장은 더디어지고 표피는 날로 각질이 되어간다. 특히 온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다니는 발바닥은 더 많은 굳은살이 박인다. 목욕탕 갈 때에는 더운물에 잘 불린 발바닥 각질층을 벗겨내고 깎아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요즘은 ..

할머니들의 말씀 / 김수봉

할머니의 말씀들은 살아온 삶의 철학이다.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무심결엔 듯 바람결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 말씀들은 어느덧 내 귀에 박혀들어, 이제 와서 되새겨보면 모두가 철학적이었다. 그 시대로선 드물게 장수하신 아흔의 나이,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건강했고 맑은 정신을 지키셨다. 그것은 어떤 비방을 써서도 아니요 보신을 위해 특별히 무엇을 잡수신 것도 없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욕심이 더 생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느니라. 내 배 다 채워놓고 남 주간디, 내 배 덜 채우고 남 줘야 공이 되는 거이제. 잣대는 열 번 대야하고 가세(가위)는 한 번 대느니라. 이런 말씀들에서 나는 빈곤을 이겨내는 작량도 남을 배려하는 도리도, 경망스러움과 신중함이 무엇인가도 조금씩 깨우쳐온 ..

무성영화 / 정호경

결국 낙향하고 말았지만, 처자를 거느린 지 십 년이 넘도록 남의 집 신세로 세월을 보낸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주인 방 바로 옆에 딸린 단칸 셋방살이였다. 얘기하는 우리들 옆에서 그 친구의 어린놈들이 뭔가 조심스럽게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후다닥하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밖으로 튀었다. 나머지 한 놈은 뒤로 약간 넘어진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셋방살이를 오래 하다 보니 애들이 저 모양이 되어 버렸네.' 쓸쓸이 웃음을 지으며 내뱉는 친구의 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가설극장에서 본 무성영화를 연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