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 도종환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1.26
불 빛 / 정호승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과거의 불행이 환하게 불이 켜져 온 언덕을 뒤덮는 복숭아꽃처럼 불행이 눈부실 때가 있다 봄밤의 거리에 내걸린 초파일 연등처럼 내 과거의 불행에 붉은 등불에 걸릴 때 그 등불에 눈물의 달빛이 반짝일 때 나는 밤의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인다 멀리 수평선을 오가는 배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등대가 환히 불을 밝히는 것처럼 오늘 내 과거의 불행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살아갈수록 후회해야 할 일보다 감사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언젠가 만났던 과거불(過去佛)의 미소인가 불행의 등불을 들고 길을 걸으.. 읽고 싶은 시 2014.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