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099

모두가 빈자리 / 정호경

저녁놀이 곱게 물든 서녘 하늘에 갈가마귀 떼가 까맣게 날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런 풍경은 문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저 아름답고 순수한 원시의 자연 풍경 그대로일 뿐이었다. 봄이면 채마밭에 장다리꽃이 노랗게 피지 않아도 평화로웠고, 여름이면 이 빠진 개가 부엌문 옆에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한가로웠다. 아무런 다툴 것도 괴로운 것도 없는, 우러르면 눈이 시린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나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돌아왔다. 올해는 비가 많아서인지 잡풀이 봉분을 엉성하게 덮고 있었고 무덤 한 쪽 모서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리고 동생 무덤에는 아카시아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아무리 독한 약을 써도 끄떡없었다. “괭이로 뿌리째 파버려야 되겠구먼” 하니..

대추나무/ 손광성

대추나무 같이 볼품이 없는 나무가 또 있을까?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대추나무와 마주칠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벚나무 같은 화사함도 없고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같은 위용도 없다. 그렇다고 가을이면 다른 나무들처럼 곱게 단풍이 드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해서 언뜻 보기에 아카시아나무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가지는 고집스럽게 뻗어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없으리.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대추나무에서는 시를 찾을 수 없을 듯싶다. 대추나무는 계절 밖에 산다. 봄이 와도 봄을 모르고 가을이 되어도 여름으로 착각하는 나무다.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지고, 벚나무며 라일락 같은 꽃나무들이 불꽃놀이라도 하듯 온통 분홍과 보라색을 내뿜으며 부산을 떨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