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닥이다
이런 날이 오리라 몰랐다면
외눈박이의 변명이다
살아온 징검다리를 헤아리면서 몇 번쯤 발등을 찍었던
충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백치의 헛웃음이다
마른 억새처럼 건너가는 겨울 호수의
종아리에 푸른 멍 자국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땅 속의 실핏줄의 맥박은 발끝까지 뻗어가고
뿌리들의 숨구멍도 목울대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러니
철새들을 태운 배가 바닥까지 가라낮지 않았다면 이렇게
갈라지고 터진 西湖*의 뒤꿈치를 보았을까
그런데 아니다
본디 진흙바닥에 앉지 않으려는 연잎의 본능은
뿌리의 앙가슴 허파에서 부터
들숨 날숨으로 견디는 것 뿐
훤히 드러난 겨울 호수의
민낯을 보고서야
알았다
저기
허공과 바닥 사이
해오라기 한 마리도
겨울 호수의 민낯을 보았다.
* 西湖 : 광주시 서구 운천동에 위치한 운천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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