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설야 산책(雪夜散策) / 노천명

윤소천 2019. 12. 5. 11:07

 

 

 

 

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문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誘惑)에 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 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말았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이 무슨 저 북구(北歐) 노르웨이에서 잡혀 온

처녀의 향수(鄕愁)이랴. 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이 제법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늘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푹 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내 발길은 좀체 집을 향하지 않는다. 기차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차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을.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를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 해

정월 어떤 날 저녁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기어이 슬픈 일을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차

소리가 소름이 기치도록 무서워진다.

 

이따금 눈송이가 뺨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맘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림쳐 거의

내가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 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서 다듬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다기를

치며 순찰을 돌아 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한 내 집 문을

 두드렸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송이 없는 방 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 창 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누웠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정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