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양지의 꿈 / 천경자

윤소천 2019. 12. 15. 11:16

 

 

 

 

아침나절에 눈이 살풋이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며 햇볕이 쬔다. 오랫동안 난로의

온기에 생명을 의지해 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화분을

햇볕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잎이 다 떨어진 채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만 이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돌 것만 같다. 뜰의 장미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 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힐낏힐낏 햇볕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가운데 큰 고무 대야를 내다 놓고,

더운 물을 붓고 가루비누를 풀어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에서 빨래를 주무르니 따뜻한

기운이 오붓하게 마음으로 번져오고 기분이 상쾌하다.

포글포글하게 올라오는 하얀 거품에 손을 담그고 내의를

주무르면 엷은 비누 냄새가 그리움처럼 코에 스며온다.

하얀 런닝셔츠의 목 언저리를 일부러 코에 대 보니

독특한 머릿기름 냄새가, 그가 금방이라도 전화해 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퍽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아이

 아버지의 내의들을 빨면서 나는 한없이 무엇인지 그립고

아쉬운 생각에 눈을 감아 버렸다.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가 눈앞에 떠오른다.

마술에 걸린 공주가 날이 밝으면 백조로 변해 숲으로

날아가버리고 왕자는 슬픔에 잠긴다. 그 중에서도

 ‘불새’라는 춤이었던가, 마술사에 의해 돌이 되어 버린 왕자를

구하려고 공주가 불새의 빨간 날개 깃털 하나를 얻으려

하는 춤. 불새가 정열의 화신인 양 불덩이가 구르듯 날개를

떨던 모습이 선하다. 어째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공주도 아니요, 아이 아버지가 왕자인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나는 짐짓 아이 아버지의 지금의

처지를 마술사에게 끌려 간 왕자의 그것인 양 생각해 본다.

 

금싸라기가 내린 듯 따스한 햇볕 아래서 나는

부질없이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굳어지는 아픈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갠 하늘. 거기서

나는 지난 밤 꾼 꿈을 찾아보았다. 태양이 없는 하늘에 백조좌의

모습으로 하얀  백로가 판박이처럼 박혀 있던 그 꿈의 하늘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차디찬 코발트빛 하늘에 하얀 레이스로

새가 날고 있는 광경은 냉혹한 지성파 화가의 그림을

몇 겹 아름답게 다듬어 놓은 듯했고, 날개의 레이스 구멍 속에는

날개를 접은 백로들이 한 마리씩 앉아 있는 게

무수한 작은 별들처럼 보였다.

 

나의 그림 세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차디차고

아름다운 광경은 하늘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누군가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불새의 깃털만 가지면

어떤 소원이라고 이룰 수 있다는 꿈같은 바람으로 먼 하늘에 떠 있는

밝고 너무도 싸늘한 백조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쫑쫑이 대문을 힘차게 열고 “엄마 어디 갔어?” 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백일몽에서 깨어 다시 빨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런대로 머지않아 봄이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