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나는 몇 해 전에 오대산(五臺山) 정상에서 본
아름드리나무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산악회원을 따라 오랜만에
나선 산행에서 우연하게 그 나무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웅장한 모습에 그만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을
오르면서 줄곧 크고 작은 나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나무에 대한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정봉(頂峰)을 지척에 둔
정상에서 숨을 토해 내느라 허리를 펴는 순간, 그 나무들은
나를 맞이하듯 내 앞에 우뚝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 뜻밖의
거목들 앞에 잠시 놀란 가슴으로 서 있었다. 그만큼 그 깊은 곳에 그런
거목이 숨어 있는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 같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서서히 어떤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내 마음에 물결처럼 번져 갔다.
대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이 나무들은 이렇듯 첩첩산중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까. 나무들이 서 있는 장소가 이런 깊은 산중이었기
때문에 이토록 거목이 되기까지 베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나무가
만일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그런 길목에 터전을 잡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밑동이 굵어질 때까지 베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경외로운 마음으로 그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기(瑞氣)같이 서려 있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 자신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마치 속세를 떠나 자신을 은둔시킨 어떤 철인(哲人)의
모습같이도 여겨졌다. 생각지 않은 장소에서 생각지 않은 거목을
만나고 온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나무의 모습을 내 가슴속에, 내 머리
속에 남몰래 간직해 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서는 벅찬
사유(思惟)의 한 명제가 되었다.
작년 가을에는 온양에서 수필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우리는 조선왕조 초기에
명재상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의 고택을 찾았다. 맹사성은
온양 사람으로, 자는 성지(誠之)요 호는 고불(古佛)이라 하는데,
세종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내면서<태종실록>을
편찬한 분이기도 하지만 청렴결백하기로 더욱 유명한 분이었다.
마침 문화부 장관이 충남 사람이라, 맹사성의 고택을
고증을 살려 복원한 역사(役事)에 자부심을 느끼는듯하여
우리는 일부러 그 곳을 방문했던 것이다.
21대 후손이 된다는 맹씨 댁 종손의 안내를
받아 옛집이 있는 윗마당으로 무심히 발걸음을 옮겼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그 마당 한쪽에 거목이 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가을이라
잎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데다가 마침 지는 해가
붉은 노을로 온통 나무를 뒤덮고 있으니, 그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에 저마다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나무들은 세종때 맹사성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하니, 수령은 족히 630년이 넘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키가 큰 나무는 높이가 35미터에 둘레가
10미터나 된다고 하니, 그 웅장함이 능히 도목(道木)으로
지정되고도 남을 위세였다. 그 댁 대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책을 읽었다는 청백리의 사랑방이나
구경하겠지 싶었는데, 생각지 않게 그렇듯 크고 우람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보게 되었다는 것은 또 한 번 내게 사유할 수 있는
감동의 여운을 안겨 준 셈이었다.
오대산 정상에서 본 그아름드리나무들이나,
맹씨행단(孟氏杏檀)에서 본 그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내게 그토록
감탄과 감동을 안겨 주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 나무들이 사람의 시선을 많이 모으는 한길에 있지 않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 고고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면, 아니 위대하다기보다는 그 인물됨이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매달리게 된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시대에 처한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현시욕(自己顯示慾)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 남보다 더 돋보이고 싶고,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고, 남보다 더 추앙받고 싶은 욕심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것에 속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마다
욕심의 꼬리를 붙들고 이렇듯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깊은 산중에 숨어 있는 나무처럼, 이 욕심이
난무하는 시대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라고 왜 세속적인 욕심이 없겠고, 그리고 왜 남보다
화려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다만 그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澄)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다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이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 사람들이 영위해
가는 삶의 형태는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삶이,
어떤 인간상이 자신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이나 생활철학과 상관되는 일일 것이다.
숨어 있는 나무, 그 나무의 의연한 모습이 이따금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욕심을 앞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내가 낙오자처럼
뒤섞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숨어 있는 나무같이
고독을 고고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내
속물근성의 잠재의식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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