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오월의 향기 / 윤소천

윤소천 2023. 7. 30. 16:27

 

 

길을 가다 보랏빛 꽃을 주워 향을 맡는다.

처음 맡아보는 매콤하면서 달콤하고 상큼한 향이

깊고 은은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제멋에 뻗은 가지에 작은 종모양의 꽃들이 송이송이

맺혀있다. 이 청사초롱 같은 꽃 타래를 흔들면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오동꽃의 보라색은 시바의 여왕이 입었다는

보랏빛 드레스를 연상케 하고, 넓은 초록 잎은

심장을 닮아 초록심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오동꽃의 고상한 색과 향기에 취해 손이 닿는

한 가지를 꺾어와 화병에 꽂았다. 이 향기에

내가 좋아하던 시詩가 떠올랐다.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 심산 숲내를 풍기며 /

5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 / 오월은 사월보다 정다운 달 /

병풍에 그려있던 난초가 꽃 피는 달 /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 듯 /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오월이다." 이는

황금찬 시인의 '5월의 노래' 중 일부이다. 잔인한

달이라는 사월을 보내고, 사랑의 오월을 처음

맞은 선생의 시심詩心이 깊이 느껴진다.

"비오는 날 / 오동꽃이 보랏빛 우산을 쓰고 /

나에게 말했습니다 / 넓어져라 높아져라 / 더 넓게

더 높이 살려면 / 향기가 없어도 괜찮다 / 나는

얼른 꽃 한 송이 되어 올라갔습니다 / 처음 올라가 본

오동나무 집은 / 하도 편안해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 당신도 오실래요?" 이는 이해인 시인의

'꽃 한송이 되어' 전문이다. 오동꽃 한 송이가 되어

오동나무 집에 올라 편안을 얻은 시인의

높은 시심이 느껴진다.

피천득 선생은 '오월'에서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라고 했다. 나의 지난 시간

들을 돌아보면 회한悔恨이 많지만, 고뇌와 아픔의

시간이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찾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젊은 한 때 나는 깊은 방황 속에

삶의 의미를 잃고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리고 한동안 나를 추스르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늦가을 무서리와 한겨울

추위와 눈보라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나의 유년의 기억마저 얼어붙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봄이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유난히 영롱하고 눈부신 아침이었다.

동화 속 숲속의 공주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사랑에 눈을 뜨듯 세상이 새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모든 것이 신비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무모했던 사십 대와 자만심에

차 있던 오십 대를 지나, 삶의 깊이를 알아

개안開眼한다는 이순耳順을 지나고

종심從心을 향해 서있다. 혼돈의 시대라 하는

현대에 백 세를 넘은 어느 노철학자는

육십 세에서 칠십 오세가 인생의 황금기라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인생은

자신을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긍정적 삶을 살 때

보람을 느낀다. 좋은 생각도 실천하지 않으면,

씨앗을 심지 않고 봉지에 담아두는 것과 같다.

날마다 새로워져 의식과 감성이 살아있는

건강하고 품격있는 날이 되어야 한다.

신록의 계절, 상쾌한 오월의 새아침이

열리고 있다. 나의 오월의 뜰에는 어느틈에

오동꽃을 닮은 오월의 여인이 와 있다.

시바의 여왕 같은 보랏빛 여인은 인생을

관조한 깊은 심안과 우아함, 그리고

매콤하고 상큼한 향을 지녔다. 우아함이

고상한 기품이고 매콤함이 명철한

지성이라면 상큼함은 세상을 달관한

혜안일 것이다.

나의 메마른 영혼에 단비 같은 오월의

여인은 멀리서 바라보면 그립고, 가까이

다가서면 내게 지혜와 용기를 준다.

그리고 내가 일상에 지쳐 있으면, 신록의

뜨락으로 나를 초대해 멈추어 돌아보는

중용의 지혜를 가르쳐준다.

신록의 오월, 오동나무 아래에서

흐드러지게 핀 오동꽃 향기에 취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봉황이 되어 오동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다. 나를 일으켜 세워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오월의 향기여!

( 한국수필 201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