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 / 윤소천

윤소천 2021. 10. 5. 19:38

                                   

 

내가 살고 있는 담양 창평은 광주에서 차로 십 여분 거리의 근교에 있는

쌀엿과 한과로 유명한 고을이다. 옛날 양녕대군의 귀양살이 때 같이 내려온

궁녀들의 솜씨를 이어 받아 쌀엿 조청 그리고 유과 약과 정과 강정 등이

지역의 특산품이다. 산지에 대나무숲이 많아 생태마을로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 옛 음식 문화와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슬로시티 운동은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호하고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마을을 등에 지고 걷는 달팽이의 모습이 슬로시티의 마스코트이다.

 

얼마 전 한 신부님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무슨 춤이라 생각 하느냐.’하는

질문을 했다. 나는 순간 백조의 호수 발레를 생각하다 하얀 외씨버선에 고깔을

쓰고 나비처럼 춤추는 승무를 떠올렸는데, 신부님의 답이 '잠시 멈춤'이라 해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유머만은 아니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찾는 곳이 있다. 이곳은 자연 그대로 남아있어

아무에게나 알려주고 싶지 않은 곳이다. 샛강을 따라 강변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 되다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선정(禪定)에 드는 것 같다. 이 길은 내게 순수한 감성을 이끌어

내 준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나를 돌아보다 사색에 잠기곤 하는데,

무지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회한 속에 부끄럽기만하다. 그러나 실패와

곤경을 통해 새로운 삶에 눈을 뜨는 것이 인생이다.

 

서두르지 않고 흐르는 강에는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철새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드넓게 펼쳐진 강변 갈대숲에는 고라니들이 뛰어 다닌다.

산 그림자가 드리운 강물에는 흰 구름이 둥둥 떠 있다. 봄이면 강변

둔치에 찔레꽃이 눈 내린 듯 하얗게 피어있고 노란 민들레, 봄까치꽃이라

불리는 은하수 같은 코딱지나물꽃등 들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졌는데,

이 들꽃 사이를 걷다 보면 나도 나비처럼 날고 싶다.

 

담양은 6월이 가장 아름답다. 담양의 6월은 산과 강변 길가 대숲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죽순이 자라고 피어나 연초록깃발을 흔들어 댄다. 이런 모습은

마치 여린 청춘이 구름을 향해 손짓하는 듯 아름답다. 강변을 따라 들어 선

대나무숲길은 이 길 저길 합쳐 시오리 길, 대숲길이 간지대 같이 길면서

반듯하게 나있다. 나는 이 길을 간지대길이라 부른다. 대나무는 가냘픈 듯

보이지만 태풍에도 마디마디가 있어 부러지지 않고 잘도 버텨낸다.

우리 삶도 대나무처럼 잠시 멈추어 그때그때 매듭을 짓는다면 단단한

삶이 된다. 그리고 이 매듭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 된다.

 

복잡하고 바빠 숨차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쉼없는 삶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 어릴 적 할머니는 내가 성급해 하면 '빨리 먹는 밥에

체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느니라.'하며 서두르는 나를 다독이며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때는 무심코 흘러들었던 말들이

지금에 와서야 귀한 말씀으로 들린다.

 

소심소고(素心溯考)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절망에

휩싸일 때, 힘들고 지쳐 모든 것을 잊고 떠나고 싶을 때, 잠시 멈추어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깊이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고향 집에 돌아온

마음으로 쉬며 생각하면 내가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동안 나는 타고난 급한 성정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큰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내게 매사에 거북이처럼 느긋하게

생각하라는 잠시 멈춤은 단순하면서 가장 좋은 처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줄 아는 느림의 삶이 나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 2021. 07 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