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담양 창평은 광주에서 차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쌀엿과 한과로 유명한 고을이다.
조선 초 양녕대군이 이곳에 귀양올 때 함께 따라
온 궁녀들의 음식 솜씨가 전해져, 유과 약과 정과
그리고 쌀엿 조청 등이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
이곳은 병풍처럼 둘러싼 산과 대나무숲이 많아 생태
마을로 불리운다. 한옥과 옛 음식 문화가 남아있어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가 되었다. 슬로시티 운동은
전통과 자연 생태를 보전하여 공해없는 자연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마을을 등에 지고 가는 느린 달팽이의
모습이 슬로시티 운동의 마스코트이다.
담양은 6월이 가장 아름답다. 산과 들 강변
대숲이 있는 어느 곳이나 죽순이 돋아나고 쑥쑥
자라 싱싱한 연초록 깃발을 하늘을 향해 흔들어
대는 듯하다. 이곳의 강변길은 내가 좋아하는 대나무
숲길이 시오리나 된다. 외길로 쭉 뻗은
이 대나무 숲길을 나는 간짓대길이라 부른다.
여기 내가 자주 찾는 곳이 있는데,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습지보존지역이다. 차로 샛강
둔치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강변길로
들어서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강가에
차를 세우고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선정禪定에 드는 것 같다.
드넓은 강변에는 청둥오리 원앙 왜가리 물새들이
한가롭게 노닌다. 봄이면 강변 둔치에 눈이 내린 듯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있고, 은하수처럼 무더기로
피어있는 봄까치꽃, 노란 민들레, 제비꽃, 이름모를
들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져있다. 삼인산 그림자가
드리운 강물에는 흰 구름이 둥실 떠 있고, 들꽃들이
피어있는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나도 나비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미사중에 신부님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무슨 춤일까.' 하고 물었다. 나는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발레를 생각하다가 외씨버선에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는 승무를 떠올렸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유머 많기로 소문난 철학 교수였던 신부님인지라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정답이 '잠시 멈춤'이라 해서 웃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깊은 뜻이 있는 우스갯소리였다.
소심소고(素心溯考)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 깊이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문제와 해답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어릴 적 내가 성급하게 굴면 할머니는
'빨리 먹는 밥이 체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시며
서두르는 나를 다독여서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때는
무심코 들었던 말이 지금은 귀한 말씀으로 들린다.
그동안 나는 타고난 급한 성정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했다. 이런 나에게 매사를 여유있게, 서두르지 말라는
'잠시 멈춤'은 단순하면서 가장 좋은 처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불확실성의 스피드시대에 거북이처럼 '느림의 삶'이
오히려 나를 찾고 추스르는 좋은 지혜라는 생각을 한다.
( 2021. 한국수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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