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손 털기 전 / 황동규

윤소천 2014. 6. 16. 06:41

 

 

 

손 털기 전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해도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거릴 때

금칠(金漆)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읽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의 식구 / 도종환  (0) 2014.06.23
지나가는 것 / 신달자  (0) 2014.06.19
별하나 / 도종환  (0) 2014.06.12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누가 사는가? / 황동규  (0) 2014.06.10
해마(海馬) / 황동규  (0) 2014.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