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상

현존(現存)에서부터 영원(永遠)을 / 구 상

윤소천 2014. 11. 2. 08:08

 

 

 

현존(現存)에서부터

영원(永遠)을

 

 

 

 

 

 

 

이 가을에 나는 그 문턱에서부터 탈이 났습니다.

양력 8월 그믐께 아침저녁과 밤이면 썰렁하곤 했었는데,

그런 어느 날 어스름 때 옛 친구가 찾아와 함께 동네 횟집에 가서

한잔 마시고 들어온 김에 더웁길래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더니,

한밤중에 깨어나서 또 지병인 천식이 도져

스무날 가까이 자리보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병에서 오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학교 강의를

비롯하여 예정되어 있던 원고, 강연, 회합 등 약속이 모두 무너지게

되어 사람노릇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도 어쩌다 한번이면 몰라도

지난 3년 동안 여섯 차례나 되니 그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은 와병소문을 내기 싫어서 출타 부재를 빙자하지만

남과의 약속사도 있으니 만 부득 실토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 지금은 천식이 발작중이라 전화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고

알리게 되어 주변들을 놀라게 하고 그러다가 기침이 멎어

멀쩡해서 나가면 마치 거짓 늑대를 만난 소년의 꼴이 됩니다.

   

실상 천식이니 해소니 예부터 집안에 그런 노인들이 한 분쯤 계셔

그저 저녁이나 밤이면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가라앉아,

일도 하면서 버티는 게 보통인데 나는 연전에 폐 수술을 두 번이나 하여

호흡기능이 1800, 보통사람의 반도 안 되는지라 한번 천식이 발작했다하면

그야말로 금시 숨이 꼴딱 넘어가는 것처럼 괴롭습니다.

어지간해야 이번 병상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겠습니까?

 

병상에서 내다보이는

책보만한 가을 하늘이

서럽도록 맑다.

   

오늘은 천식(喘息)의 발작도 멎고

열기(熱氣)도 가시고

향유(香油)를 바른 시신(屍身)처럼 편안하다.

   

나 자신의 갈구(渴求)도

무엇에 대한 미련(未練)도 벗어난

이 시각(時刻)!

   

죽음아, 낙엽(落葉)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렴.

  

일반적으로는 죽음이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지만

인간의 육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오히려 죽음이 간절해지는 것을 나는 때마다 체험합니다.

지금의 천식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해방 직 후 북한 원산에서

시집 <응향(凝香)>사건으로 필화를 입고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불기 하나 없는 가옥사(假獄舍)에서 얼어드는 추위와

피곤과 절망에 휩싸였을 때나, 또는 1965년 일본 동경교외

<기요세>병원에서 제 1차 폐 수술 후 그것이 탈을

내서 8~9일이나 고통이 멎지 않았을 때도 바로 그랬었습니다.

   

이 어찌 나뿐이겠습니까? 이즈막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희범교수

부부의 동반자살이나 그 뒤 이를 본 따듯이 젊은 미망인이

어느 호텔에서 추락 자살한 사건이나 이 모두가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안식을 취하려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 죽음의 안식>이 그렇듯 뜻대로

와 지느냐가 문제입니다. 가령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즉 우리의 영혼의 불멸이나 내세가 없이

육신의 죽음으로 종말을 짓고 만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고 공포가 있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 죽음아, 다가오렴 >하고 읊은 나는 바로, 그 시 다음 절에서는

 

앓아누워야만

천국행(天國行) 공부를 한다.

   

마치 입시(入試) 전날에 사

서두르는

게으름뱅이 학생 같다.

   

교과서(敎科書)야 있고

참고서(參考書)도 많지만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댄다.

   

그래서 재수(再修)부터 마음먹는

수험생(受驗生)처럼

<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지만

번번이 헛 다짐이다.

이러다간 영원한

낙제생(落第生)이 되지 싶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이렇듯 내 스스로를 따져 볼 때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정체는 내세에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세를 믿는다는 나는 왜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누구나 저승에서의 행복이 확보되어 있다면 못 가본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내세에 대한 길흉의 가능성이란

스스로가 선택하고 스스로가 준비하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20세기의 현철(賢哲)인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마따나 우리는

< 현존(現存)에서부터 영원(永遠)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읽고 싶은 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책과 격려 / 구 상  (0) 2014.11.04
참된 기도 / 구 상  (0) 2014.11.03
장식 소고 / 구 상  (0) 2014.10.31
여성의 매력 / 구 상  (0) 2014.10.27
성급과 나태 / 구 상  (0) 201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