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식 소고
나는 여의도에서 아파트살이를 하고 있는데 우리 집에
특이한 것이 있다면 거실에 성황당 같은 돌무덤이 지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한마디씩
<저 돌들은 모두가 잡석이죠? > 하곤 합니다.
실상 그 돌들은 수년 전 아직도 한강변 모래밭이 새마을
취로사업으로 정리가 되기 전, 이곳저곳 아무데나 딩굴고 있는 것을
내가 산책을 나갔다가는 한두 개씩 주워다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위 수석(壽石)으로서의 아취
즉 어떤 모습을 지닌다거나 모양을 지니지 않은 막 생긴 막돌입니다.그래서
나 스스로도 이것이 운치 있는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놓아두는 데는 나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애기가 조금 달라지지만 페르시아 카펫이라고 부르는 양탄자에는
오아시스 옆에 무성한 야자나무와 기린의 모습이나 싱싱한
줄기에 만발한 장미꽃 등이 무늬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카펫 위에 서면 아련한 환상에 잠깁니다.
아마 그것은 내리쬐는 태양과 계절 없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에서 우러난 장식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상상 속에서나마 저러한 자연과 계절을
생활 속에서 즐겨보려 들었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들 뿐 아니라 우리의 옛 선조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듯 곤경과 재난의 세월 속에서도 산수, 화조, 선인도 등
족자나 병풍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가구와 식기, 심지어는 침구의
벼갯모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그 장식성 배후에는 자연과 교류로 인한
생활의 확대와 확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식이란 인간 삶의 공간을
비약적으로 넓혀주고 깊게 해주는 것을 원리로 합니다.
저 유명한 나치스 독일이 채택한 고문방법이 흰 벽만으로
둘러진 방에 흰 형광등을 드리우고 한 사람만을 가뒀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도 장식은 인간 삶의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날 우리생활의 주거 속에는
흰 벽은커녕 아주 틈바구니가 없도록 많은 물건으로 차 있는데
그 장식이 우리의 삶의 꿈을 부풀게 해주기는커녕
모두가 비정을 경쟁하듯 나타내는 느낌입니다.
예를 들 것도 없지만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소제기를
비롯해 모든 철제품과 플라스틱 기구와 유리의 기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위 룸 악세사리라는 것들도 기계로써 양산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들어오면 그러한 경공업적 상품에 생활공간을
점령당하고 밖에 나가면 빌딩과 포장도로, 차량 등
중공업적 물량에 압도당해 사는 느낌입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우리의 생활공간을 저 자연과 꿈으로
삼고자 했던 장식의 원리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에 내가 한두 마디로 대답을 할 재주는 없습니다.
오직 나 역시 잡석이라도 주워다 성황당을 차려 놓고 있는 것은
바로 저러한 공업시대의 비정한 생활공간에 대한
소박한 대응책이라고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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