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 15

두 그루 은행나무 / 홍윤숙

두 그루 은행나무가 그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때가오니 한 그루는 순순히 물들어 황홀하게 지는 날 기다리는데 또 한 그루는 물들 기색도 없이 퍼렇게 서슬 진 미련 고집하고 있습니다 점잖게 물들어 순하게 지는 나무는 마음 조신함에 그윽해 보이고 퍼렇게 잘려 아니다 아니다 떼를 쓰는 나무는 그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 알 수는 있지만 왠지 일찍 물든 나무는 일찍 물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그윽해 보이는데 혼자 물들지 못하고 찬바람에 떨고 섰는 나무는 철이 덜든 아이처럼 딱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을 닮았나 봅니다 날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마주 서서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 집 앞 가을이 올해도 깊어 갑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8

그리스도 폴의 강 36 / 구 상

​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 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이고 이뤄질 것이다 ​ 저 망망한 바다 한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 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

읽고 싶은 시 2024.01.27

눈 내리는 길로 오라 / 홍윤숙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서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밞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읽고 싶은 시 2024.01.24

자존심에 대한 후회 / 정호승

나에겐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돈과 혁명 앞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큰 자존심을 버려야했다 버릴 수 없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내가 사는 줄 알았다 칼을 들고 내 자존심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자객처럼 자존심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자존심은 늘 웃으면서 산불처럼 되살아났다 어떤 자존심도 도끼로 뿌리까지 내리찍어도 산에 들에 나뭇가지처럼 파랗게 싹이 돋았다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 나의 일생은 이미 눈물로 다 지나가고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죽음의 자존심은 노모처럼 성실히 섬겨야한다 자존심에도 눈이 내리고 꽃이 피는지 겨울새들이 찾아와 맛있게 먹고 가는 산수유 붉은 열매가 달려 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2

겨울 언덕 / 김연동 詩 황덕식 曲 . Ten 안형렬

갈꽃 진 겨울 언덕 바람이 불다 갔다 황혼이 쓸린 그 자리 어둠이 짙어오고 박토의 가슴 위에는 흰눈만이 내린다 가슴을 풀 섶에 놓아 이슬방울 받고 싶은 풀무치 울음 타던 계절도 지나고 우리는 무엇에 젖어 이날들을 울 것인가 눈 덮인 겨울 언덕 낙엽이 흩날린다 별빛이 부서진 자리 찬 서리 가득하고 메마른 가슴 위에는 겨울비가 내린다 푸르른날 그리워지는 이 계절 지나가면 꽃 피고 새가 우는 싱그런 하늘 밑에 우리는 풀잎에 젖어 지난날을 노래하리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 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遂)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모양 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엉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連嶂)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있는 청열(淸烈)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

읽고 싶은 시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