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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 정호승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자나는 동안 찻잎 한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 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읽고 싶은 시 2014.02.15

눈을 감고 / 홍윤숙

언제부터인가 나는 눈을 감고 밥을 먹는다 눈을 감고 세상을 보고 눈을 감으면 씹는 밥알 한 알의 맛이 더 깊어지고 현란하게 채색된 세상이 한 장 수묵빛 그림이 되고 그 그림 위로 소슬한 바람 불어 하얗게 지워진다 눈을 감으면 떠돌던 내가 내안에 들어오고 온 세상 소요도 잠잠히 잦아들고 내 안의 물결치던 크고 작은 이랑들이 하나로 모여 허공을 만들고 출렁이던 가슴 서서히 가라앉고 텅 빈 허공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해진다 아직 내가 이곳에 살이 있음이 눈부시고 죽음 같은 고독이 꽃잎인 양 향기로워진다 눈을 감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더욱 깊이 확인하고 깨닫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눈을 감는 것은......

읽고 싶은 시 2014.02.12

꽃다지 / 도종환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있는 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1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