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100

정서진(正西津) / 정호승

벗이여 지지 않고 어찌 해가 떠오를 수 있겠는가 지지 않고 어찌 해가 눈부실 수 있겠는가 해가 지는 것은 해가 뜨는 것이다 낙엽이 지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듯이 해는 지지 않으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벗이여 눈물을 그치고 정서진으로 오라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히 노을 지는 정서진의 붉은 수평선을 바라보라 해넘이가 없이 어찌 해돋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해가 지지 않고 어찌 별들이 빛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 인생의 이 적멸의 순간 해는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찬란하다 해는 지기 때문에 영원하다

읽고 싶은 시 2014.03.07

무인등대 / 정호승

등대는 바다가 아니다 등대는 바다를 밝힐 뿐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당신이다 오늘도 당신은 멀리 배를 타고 나아가 그만 바다에 길을 빠뜨린다 길을 빠뜨린 지점을 뱃전에다 새기고 돌아와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방파제 끝 무인등대의 가슴에 기대어 운다 울지 마라 등대는 길이 아니다 등대는 길 잃은 길을 밝힐 뿐 길이 되어야 하는 이는 오직 당신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3.05

너를 위한 노래 5 / 신달자

한 발자국만 가면 수심 깊은 강 이쯤에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바람이 지나온 세월을 찢고 있다 아직은 다 죽지 못해서 내 피 섞인 시간들 울부짖으며 뜯기며 넝마가 되네. 바람은 내 충직한 하수인 흉물스러운 모습들 내 등 뒤로 날라 보냈는지 경건히 남은 목숨을 내어 놓고 수심 깊은 강에 먼저 마음이 걸어가는 고요한 명목의 시간 바람도 나와 같이 무릎 꿇는다. 하늘의 초승달 은빛 칼처럼 내려다본다. 내 무엇을 숨길 수 있으랴 어디를 간 들 바람을 피하며 혹은 하늘의 시선을 거스를 수 있느냐 내 이미 수심 깊은 강에 들어섰으니 그대여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뿐.

읽고 싶은 시 201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