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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톳제비 / 권정생

안동 톳제비는 익살맞은 장난꾸러기여서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놀이 친구처럼 정이 간다. 일본의 도깨비는 그 모양부터 사납고 흉하며 인간들에게 약탈과 살인까지 범하는 악귀인 데 비해 우리의 톳제비는 너무도 착하다. 술 취한 남자가 밤새도록 톳제비와 씨름을 하다 날이 센 뒤에 보니 버려진 디딜방아나 헌 빗자루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서로 몸을 비비며 사용해 온 빗자루나 디딜방아 같은 연장을 불에 태워 없애지 않는다. 그것들은 비록 나무토막이나 수수 대궁이긴 하지만 사람들을 위해 오랜 세월 수고해 준 것이니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영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신神이 되듯이, 사람을 위해 수고해 준 연장도 그 수명이 다하면 차이는 두지만 역시 신으로 인정해 준 우리네 조상들의 마음씨가 너무도..

저녁 무렵 / 도종환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14.03.10

신발정리 / 정호승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 창 너머 개나리는 또 피는데 당신이 신고 가리라 믿었던 신발만 남아 오늘은 식구들과 강가에 나가 당신의 모든 신발을 태운다 당신이 돌아다닌 길을 모두 태운다 푸른 강물의 물결 위로 신발 타는 검은 연기가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날 당신이 떠나던 날 당신을 만나러 조문객들이 자꾸 몰려오던 날 나는 문간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집힌 그들의 구두를 정리했다 이제 산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과 죽은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이 다르랴

읽고 싶은 시 2014.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