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光州를 안고 있는
무등산은 인근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자애롭고 든든한 모습이다.
무등無等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만물이 평등하다는 하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부드러운
무등의 능선은 푸른 하늘에
욕심 없이 그어놓은 한 가닥
선線이다.
나는 무등산 아래 빛고을
유동柳洞, 버들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품에서 포근했던
유년시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탱자 울 너머로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시내에 첫눈이 온다는 말에
무등산에 하얀 눈이 내린 아침이면,
누나는 일찍 일어나 ‘눈 왔다.
무등산에 눈 왔어.’하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마루로
나와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학창시절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무등산은 저 멀리서 먼저
어서 오라는 듯 두 팔을 벌려
어머니처럼 맞아주었다.
지난날은 무지와 오욕으로
보낸 철없는 시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산 아래 살면서 무등산을
잊고 지냈다. 돌아보면 어리석은 헛된
욕망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야
감사하는 삶에 눈을 뜬 것 같다.
무등은 석가모니가 히말라야
설산 보리수 아래에서 육 년 고행 끝에
얻은 깨달음이 무등정각無等正覺이라
해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무등산이 성산聖山임을 안 것은 회갑을
넘어서였다. 승僧과 속俗을 넘어서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무애無碍의
삶을 살다 간 원효元曉를
알고 나서였다.
주봉인 천왕봉과 서석대와
의상봉을 마주보고 서있는 원효봉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무등의
능선을 그대로 닮았다. 원효봉 아래
원효사元曉寺는 내가 자주 찾는
곳인데, 오르는 길이 편안하면서
고즈넉해 사색에 젖게 한다.
달 밝은 밤이면 푸른 달빛에 어스름한
숲이 한데 어우러져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분해진다. 이 길은 나를
명상으로 이끄는 담담淡淡한
심상心想의 길이다.
엊그제는 봄이 돋는다는
입춘立春, 무등산에 봄눈이 내렸다.
눈을 맞으며 오른 무등산은
천왕봉天王峰과 지왕봉地王峰
인왕봉人王峰 그리고 서석대瑞石臺
설경雪景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수정병풍이라 불리는 서석대의
산철쭉에 핀 상고대와 눈꽃이
환상적이다. 파란 하늘 아래 상고대는
크리스탈처럼 빛나고, 군락을 이룬
철쭉의 눈꽃은 하늘의 꽃인 양
황홀하다. 눈꽃 속에 나의 가슴은
환희로 벅차올랐다.
눈이 쌓인 봉우리들이
파란 하늘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무등산의 모습은
성스러우며 장엄하다. 이 무등의
성스러운 빛은 무등을 딛고
무상(無常)을 넘어 어둠과 밝음을
초월한 빛이다. 속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빛이다. 화광동진은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인데 ‘깊은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범속함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세속에 겸허하게 묻혀
사는 거사(居士)의 모습이다. 이 보이지
않는 장엄하면서 성스러운 무등의
빛이 빛고을을 비추고 있다.
무등, 그대로의 의미는 때
묻지 않고 순박하여 걸림이 없는 자연
그대로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동심童心의 세계이다. 무등산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번뇌 망상 까지
사랑으로 감싸는 어버이와 같은
자애로운 성산聖山이다.
눈 덮인 무등산無等山
바람 잔 산정山頂
성스러운 설봉雪峯
선정禪定의 정경情景이여!
천왕봉 원효봉 서석대 입석대
품어 안은 무등無等
어머니 품처럼 깊고 포근하다
무등無等의 무애無㝵를 넘어
맑게 트인 하늘
저녁 노을이 곱다
지난 가을 산마루
무서리에 자지러진 나목裸木
차가운 눈은 내리고
꽃샘추위에
기다림마저 잊은 봄
먼 길 돌아와 바람 자고
무상無常을 넘어
찬연粲然한 햇살에
눈부시어 눈 비비며
맞는 새봄
화엄華嚴 열리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새 아침
우리
부활復活의 화관花冠 쓰고
환희로 피어나자.
(한국수필,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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