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차를 마시며 / 윤소천

윤소천 2024. 9. 16. 18:01

 

 

 

1990년 초였다. 사업차 서울에 갔다가

친구와 홍익대 앞 전통 찻집에 들렀는데, 찻집 분위기가

고풍스럽고 편안했다. 처음으로 다기에 우려내어

차를 마셨는데 깊고 은은한 향이 입안에 오래 남아 있어

참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의 귀한 일급

청차淸茶였다. 나는 급한 성정에 친구가 추천해준

다기와 차 두 봉지를 사 들고 내려왔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나서야 차 맛을 알게 된

듯하다. 차 문화가 시작된 중국에서는 예부터 차는

정행검덕精行儉德한 사람에게 좋다 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평정심平靜心이 있어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산다는 말이다. 이들을 매사에 처신이 반듯하고

여유가 있어 겸손하고 덕망있는 현자賢者라 했다.

 

옛글에서 차의 첫 잔은 우매愚昧한 마음을

씻어 상쾌한 마음을 갖게 하고, 둘째 잔은 마음의

티끌을 없애며, 셋째 잔은 도를 깨쳐 괴로움과

번뇌를 지워준다 했다. 차와 하나 되는 깨달음을

얻으면 나를 바로 보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뜬다

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는 인내를 배워 이웃을

배려하며 용서하는 지혜를 얻는다 했다.

 

중국의 다소茶疏에는 차를 마시기 적당한

때로 “몸과 마음이 한가할 때, 시詩를 읽고 피곤할

때, 밝은 창가 책상 앞에 앉을 때, 화창한 날

산들바람이 불 때, 가볍게 가랑비가 내리는 날, 여름날

정자에서 더위를 피할 때, 자그마한 서재에서 향을

피울 때 등”이라 했는데 자연과 하나 되어 풍류를

즐기는 옛사람의 깊은 정서를 엿볼 수 있다.

 

번잡한 일상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가 나도

모르게 생기를 잃고 시들해진다. 이럴 때 나는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신다. 차는 마음에 맞는

사람과 마시면 좋지만, 언제든 마실 수 있어 혼자

마실 때가 편하다. 요즈음 나는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리고 저녁이면

하루를 돌아보며 차를 마시곤 한다.

 

녹차와 물이 어우러져 우러나는 연두빛

색과 은은하며 배릿한 맛이 차의 감윤한 맛이다.

이 순간이 참나를 만나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하는 선정禪定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선정의 시간이

세상 시름이 사라지는 해인海印의 바다를 건너,

메마른 마음이 채워지며 내가 새롭게 태어나 한

걸음씩 익어가는 화엄華嚴의 세계이다.

 

사상과 생활의 소박함과 검소함이 문화와 문명의

건전하고 숭고한 이상이라 한다. 무등산無等山에서

다원茶園을 일구어 춘설차春雪茶를 재배하였던

한국화의 대가 의도인毅道人 허백련 선생은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였다. 봄이 오면 무등산

숲 그늘에서 처음 차를 함께한 친구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다.

 

어느 날 혼자 차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너는 절의 스님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하셨는데, 차를 마실 때마다 이 말씀이

떠올라 아버님이 그립다. 이번 기일에는 아버님께

감윤한 차 한잔을 올려드려야겠다.

 

(한국수필. 202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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