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닭 울음소리 / 윤소천

윤소천 2020. 11. 3. 19:15

 

 

도시 근교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들리는 소리가 닭 울음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아침저녁 풀벌레소리다. 처음에는 소란스레 들렸지만

세월이 흘러 자리가  잡히자 이제는 정겨운 일상의 소리가 되었다.

먼동이 트면 멀리 가까이에서 수탉들은 날개를 퍼덕여 힘차게 홰를 치며

청아한 목소리로 꼬~끼오꼬 하고 천지를 깨운다.

 

우리 선조들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가

돌아가고 잡귀가 모습을 감춘다고 믿어 제사를 지낼 때 닭 우는소리를

기준으로 하였다. 주역에서 닭은 팔괘의 손(巽)에 해당하는데

방위가 여명이 시작되는 남동쪽이어서 상서로운 동물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는

수탉을 악마를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대혁명 후 정의 용기 평등을 상징하는 국조(國鳥)로삼았다.

프랑스 화폐에는 자부심의 표상으로 수탉문양이 새겨져있다.

 

닭은 오덕(五德)을 지녔다 했다. 닭의 붉은 볏은 문(文)으로

선비의 벼슬을 나타내고, 날카로운 발톱은 무(武)이고, 용(勇)은 적을 만나면

온힘을 다해 싸우는 기백, 먹이가 생기면  서로 불러 나눠 먹는

인(仁), 그리고 밤을 지키며 때를 놓치지 않고 새벽을 알리니 신(信)이라 했다.

닭 울음소리가 좋아 마당 한 편에 닭을 기르기 시작한지 십여 년이 되었다.

처음 수탉 한 마리에 암탉 너 댓 마리를 사다 기르기 시작했는데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해진 뒤나 초저녁, 한 밤중에 울면

불길하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토종닭을 기르고 부터 제 때를

알아 우는데 우리 닭이 울면 저 동네 닭들도 따라 운다.

 

내가 외출해서 돌아오면 닭들이 먼저 알고 꼬꼬꼬하며 반긴다.

모이 바가지를 들고 닭장 안으로 들어가면 닭들은 내 발밑으로 쪼르르

몰려온다. 모이를 줄듯하다가  멈칫하고 뒷걸음질 치면 닭들은

목을 빼고 몸을 흔들면서 쫓아온다. 수탉은 여러 암탉을 거느리고 구구거리며

잘도 지낸다. 새까맣다 못해 청(靑)빛이 도는 우리 수탉은 맨드라미같은

빨간 볏과 윤이 나며 푸른 듯 까만 꽁지깃을 바짝 세우고 운다.

꼬~끼오꼬 울 때는 턱 볏을 길게 늘어뜨리고 목덜미 털을 부풀리면서

나팔 불듯이  목울대를 길게 빼 외친다. 그리고 암탉들을 거느리고 호기롭게

가화만사성이라는 듯 위용을 부리며 한껏 뽐낸다. 평소 숫기 없는 나는

이런 수탉의 기상을 볼 때면 부럽기도 했다.

닭 울음소리는 가까이서 보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 한가하고

평화롭다. 필리핀 여행 중에 세브 해변 숙소에서 들었던 새벽 닭 울음소리와

중국 계림 상공산(相公山) 오르는 길에 들었던 낮닭 울음소리는 잊혀

지지 않는 닭울음소리다. 닭 울음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현대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정감을 주며 언제 어디서든 평화롭고 예스러운 정취를 불러온다.

서산대사는 전주지방 어느 고을을 지나가다 낮닭울음소리를 듣고

시절인연이 되어 문득 밤과 낮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천지간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육신은 늙고 병들어 한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젊음도 늙음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머리는 백발이나 마음은 백발이 아니다 / 지금 닭울음소리를 듣고 장부로서

할 일을 다 깨달았다 / 홀연히 나를 보니 온갖 것이 나 아님이 없다”* 했다.

 

새벽닭이 울면 내 마음에서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어둠을 밝히는

닭울음소리 같이 늘 선각자적인 깨어있는 수필이었으면 한다.

 

* 서산대사의 오도송 過鳳城聞午鷄.

봉성을 지나다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中에서

 

( 월간문학. 2021 .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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