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막동리 소묘 / 나태주

윤소천 2019. 11. 11. 09:36


막동리 소묘






1

아스라이 청보리 푸른 숨소리 스민 청자의 하늘,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보리밭 이랑 이랑마다 솟는 종다리.


2

얼굴 붉힌 비둘기 발목같이 발목같이

하늘로 뽑아올린 복숭아나무 새순들,

하늘로 팔을 벌린 봄 과원의 말씀들,

그같이 잠든 여자, 고운 눈썹 잠든 여자.


3

내버려 두라, 햇볕드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때가 되면 사과나무에 사과꽃 피고

누이의 앵두나무에 누이의 앵두가 익듯

네 가슴의 포도는 단물이 들 대로 들을 것이다.


4

모음으로 짜개지는 옥빛 하늘의 틈서리로

우우우우, 사랑의 내력(來歷) 보 터져오는 솔바람 소리.

제가 지껄인 소리 제가 들으려고

오오오오, 입을 벌리는 실개천 개울물소리.


5

겨우내 비워둔 나의 술잔에

밤새워 조곤조곤 봄비 속살거리고

사운사운 살을 씻는 댓잎의 노래,

비워도 비워도 넘치네, 자꾸 술이 넘치네.


6

물안개 슬리는 차운 산허리

뻐꾸기 울음소리 감돌아 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라.

아침마다 골짝 물소리에 씻는 나의 귀.


7

감나무 나무 속잎 나고

버드나무 실가지에 연둣빛 칠해지는 거,

아, 물찬 포강배미 햇살이 허물 벗는 거,

보리밭에 바람이 맨살로 드러눕는 거.


8

그 계집애, 가물가물 아지랑이 허리를 가진,

눈썹이 포로소롬 풋보리 같은,

그 계집애, 새봄맞이 비를 맞은 마늘촉 같은,

안개 지핀 대숲에 달덩이 같은.


9

유채꽃밭 노오란 꽃 핀 것만 봐도 눈물 고였다.

너무나 순정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아, 열여섯 살짜리 달빛의 이슬의

안쓰러운 발목이여, 모가지여, 가슴이여.


10

덤으로 사는 목숨 그림자로 앉아서

밤야심경 펴든 날 맑게 눈튼 날

수풀 속을 헤쳐 온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네.

꾀꼬리 울음소리가 대신해서 경을 읽네.


( 1974-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