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시내 궁동 예술의 거리는
토요일마다 장이 선다. 근처에서 고창 사는 선배
문인을 만나 골동품을 구경하고 화랑에
들렀는데 한 작품 앞에 걸음이 멈춰겼다. 의재毅齋
허백련의 늠연한 기품에 서기가 느껴지는
소나무 그림이었다. 나는 근엄하면서 담백한
소나무의 서기에 이끌렸는데,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는 선배의 말에 선뜻 구하게
되었다. 거실에 걸어 놓으니 의연毅然한 군자의
기품이 풍겨 나왔다.
이 일로 한동안 잊고 지낸 동양화에
관심이 생겨 화랑을 가끔 찾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남농南農 허건의 노송을 보았다.
격조 있게 뻗은 가지에 철석鐵石의 기세로
바늘처럼 솟아난 잎에서는 솔향이
나는 듯한 명품이었다. 거실에 있는 선생의
수묵산수水墨山水와 풍죽風竹이 이
노송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소장하게 되었다.
차를 마시며 차분히 작품을 본다.
남농 선생의 작품에는 편안하면서 격조 높은
예술성이, 의재 선생의 작품은 자연과
하나 된 높은 품격이 느껴진다. 이런 작품을
대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그림의 경지에 젖어 든다.
올해는 소나무와 인연이 있는지,
연초에 해남 대흥사 동백을 보러 갔다 고산孤山
윤선도의 녹우당綠雨堂에 들러 장대한 소나무와
해남 군청 마당에 있는 수성송守城松을
보고 왔다. 녹우당의 소나무는 삼백 년이 넘은
아름드리 소나무인데 거침없는 기상으로
높이 솟아있다. 이 소나무 등걸은 새끼 거북이
하늘 바다天海를 향해 줄지어
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수성송守城松*은 수령 사백여 년의
천연기념물로 길게 늘어진 가지가 일품인
낙락장송落落長松이다. 수성송을
처음 본 것이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우람한
가지 사이로 비친 달은 하늘의 눈동자를
본 듯 환상적이었다. 나는 며칠 후 이 장엄한
소나무를 다시 보러 갔는데 사방으로
늘어진 해묵은 가지들이 유연하면서 기상이
있어 청룡이 날아오르며 춤추는 듯했다.
바람결에 청아한 솔향이 느껴졌는데, 늘어진
가지 사이로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하여
눈 서리를 모르는다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은
그로 하여 아노라
이는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중 솔松이다. 노송은 흐르는 세월 속에 천둥
번개를 맞고, 눈에 쌓여 가지가 꺾이며
부드럽고 온화하게 스스로 몸을 다듬는다.
그리고 주위의 나무와 조화를 이루어
기품 있는 노송이 된다. 노송은 초목의
군자이며, 흐르는 세월을 나이테로
보여주는 성자이다.
*수성송守城松
전남 해남 군청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40호. 400여 년 된 해송으로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헌 뜰에 심은 소나무.
(한국수필. 201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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