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가슴에서 피워올린 봄 한자락 / 신달자

윤소천 2014. 4. 27. 07:17

                

 

 

 연의 숨결소리를 정작 귀로 듣는 계절은 다름 아닌 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그 말은 틀린 말인지 모른다. 자연의 숨결을 듣는

것은 귀뿐만이 아니라 가슴이며 눈이라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의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귀나 눈이나

가슴의 부분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봄은 역시 온몸으로 다가오고

온몸으로 느끼는 자연의 강렬한 만남인 것이다. 봄을 젊음의 계절로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큰 실수라고 지적되어야 한다.

봄은 특수한 사람들의 계절이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고 삶을 아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모든 사람의 충만한 계절인 것이다.

 

 겨우내 가정살림에서 동면의 답답함을 느꼈던 주부들도 봄의

창을 활짝 열고 새로운 계획으로 일어서야 할 때다. 주부들이야말로

봄의 계절을, 현란한 꿈을 봄꽃들과 더불어 피워내고 관념적 봄이

아닌 구체적 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더러는 생활 구석구석에 개운치

않은 절망과 근신도 없지 않으리라. 아지랑이로 아물아물

눈앞을 간지럽히는, 수런대는 봄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느끼는

여성도 없지 않으리라. 그저 산뜻하고 눈부시게 오는 저 찬란한 봄이

과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로 앞에 당도한 봄을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여성 또한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거다.

 

 그러나 자연의 신비와 자연의 경건한 축복은 인간적인 차원의

근심과 절망을 가볍게 떨치므로 새로운 활기와 원기를 회복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렇다. 봄의 사람은 누구나 그 걸음에 리듬을 갖는다.

몸짓에, 말에, 표정에 따스한 온기를 갖는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봄이 움직이며 봄의 씨앗이 껍질을 벗고 푸른 싹을 내어 밀었기 때문이다.

봄은 내가 느끼기 전에 이미 내 가슴에서 눈을

뜨고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봄은 우리를 바쁘게 만든다. 오랜 묵은 청소를 하게하고

가구를 닦고 화초를 손질하며 뜰이 있는 집에선 마당을 새롭게 가꾸게

된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리어카에 실린 화분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왠지 모르게 푸르름에 발이 멈추게 되고 알지

못했던 꽃 화분의 이름이 알고 싶어진다. 집이 좁아서 어디

제대로 놓을 자리가 없는 사람도 황홀하게 피어있는 꽃 화분 하나를

사게 된다. 꽃 화분을 안은 주부는 왠지 행복해 보이고 사랑스럽다.

그녀가 곧 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봄이 되는 여성처럼

찬란하고 생기 있는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봄 몸살은 그것이

앓는 일임에도 화려하게 보이는 까닭은 봄이

 주는 찬란한 생동감 때문이리라.

 

 봄을 생명의 계절, 깨어나는 계절 혹은 재생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봄이 제아무리 <와와> 일어서는 생명의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그 봄을 맞이하는 사람이 깨어 있지 못하고

타성적이고 관습적인 봄으로, 어깨 너머로 흘러 보낸다면 이 봄의

열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봄은 훨씬 여성에 가깝다.

환희와 생동감을 일으키는 힘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열렬하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가진 여성적 가슴으로

봄을 불러들이고 봄을 맞으며 겨우내 기다렸던 새 희망을 새로운

힘으로 길러내어야 할 것이다. <봄은 나 하나를 위해서 온다>

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나쁘지 않다. 그만큼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