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바라보는 봄 / 신달자

윤소천 2014. 4. 25. 07:26

 

 

 

 먼 산에 잔설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바라다보이고 소매 끝을

스치는 바람이 맵고 옹골차지만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 봄은 깊이 들어와

있는 듯하다. 겨울이 지루하게 느껴졌음일까 ? 봄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리게 하며 찾아오고, <정말 봄이 온 것인가 ?> 하는 확인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 봄은 역시 깨어나고  일어서고 그래서 더욱 미래

지향적인 희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앉은뱅이 풀들이 푸른 꽃대를 지켜들고 일어서는

봄의 축제 외에도 결코 제외될 수 없는 귀중한 행사가

 봄 속에는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지만 <보오옴>을 줄인 말로 바라보는 일

혹은 바라보는 정신의 계절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황량한

겨울 들판, 때로는 죽음의 들판으로 비쳐왔던 그 땅 위에 생명이

넘실거리며 초록의 잎새가 솟아오르는 것은 막연히 계절의 변화를

인정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리라. 그렇다. 느낌만으로 봄이란

계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한다. 보아야

한다. 더 크게 눈을 떠야 한다. 봄이란 보는 이에게만 생명의 의미와

생명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교훈적인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 다음엔 <보는 계절>로 엄격하게 <봄>으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지금 우리 주변에는 실로 보아서는 안 되는 오염 문화와

얼을 심기보다 무참히 빼앗는 비상식적인 저질 문화가 비온 뒤의

죽순처럼 그 숫자를 늘리고 있다. 때로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망설여질 때도 있다. 활자와 영상으로 인간의 질을 높이고자

앞장선 문화의 심장부가 더 조마조마하게 문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음도 사실이다. 봄은 자연으로부터 그 은밀한 진실과

아름다움을 지상의 교과서로 펼쳐 놓는다. 저질 문화에 먼지 낀 눈을

봄이 주는 맑은 자연으로 해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눈으로 우리가 선택해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의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눈이란

얼마나 소중한 우리들의 재산인가?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사흘 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 한 적이 있다. 그 첫날에 그녀는

삶의 보람을 느끼도록 해준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들의 고결한 성품을 오래 잊지 않도록

마음속 깊이 새겨 두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말했다.

그 후엔 서늘한 숲속을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에 가득

채우리라고. 그리고 황홀한 저녁놀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인 헬렌 켈러가 만약 사흘만 눈을

뜰 수 있다면 하고 가정했던 그 첫날에 그녀는 다름 아닌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과 자연을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늘상 그것을

가장 중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품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봄이 왔다.

눈을 뜬 자는 무엇을 볼 것인가 ?  다가온 봄에 생각하고, 진실로

이 귀한 아름다운 자연의 실체를 보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리라고 자신에게로부터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