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 손광성

윤소천 2014. 5. 29. 07:35

 

 

 

 수련을 가꾼 지 여남은 해. 엄지손가락만한 뿌리를 처음

얻어 심었을 때는, 이놈이 언제 자라서 꽃을 피우나 싶어 노상

조바심이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꾸 불어나서 이웃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지금 내 물둠벙은 수련으로 넘친다.

나누어 줄수록 커지는 것은 사랑만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가져간 분들로부터 첫 꽃이 피었다는 전화라도 오는

날은 마치 시집간 딸의 득남 소식이 이러려니 싶을 만큼

 내 마음은 기쁨으로 넘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때도 있다.

말려서 죽이지 않으면 얼려서 죽인다. 그런 때는 소박을

맞은 딸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난을 탐내는 사람은 많아도 제대로 가꾸는 사람은

드물더라는 가람 선생의 말씀이 그 때마다 귀에 새로웠다. 수련은

유월과 팔월 사이에 핀다. 맑은 수면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잎사귀는 잘 닦아 놓은 구리거울처럼 윤택하다. 거기에 어우러져

피어 있는 한두 송이 희고 청초한 꽃. 보고 있으면 물의 요정이

저렇지 싶을 만큼 신비롭다. 선(禪)의 세계라고나 할까.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은 수련을 심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수련은 아침 햇빛과 함께

피고 저녁놀과 함께 잠든다. 그래서 ‘水蓮’이 아니라, 잠잘 수자 ‘睡蓮’이다.

이렇게 피었다 잠들기를 되풀이하다가 나흘째쯤 되는 날 저녁,

수련은 서른도 더 되는 꽃잎을 하나씩 치마폭을 여미듯 접어서는

피기 전의 봉오리였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처음 보는 사람은 피기 전의 봉오리인 줄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잘 주의하여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쉬이 알게 된다. 피기 전에는 봉오리가

대궁이 끝에 반듯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지만 지고 있을 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비녀 꼭지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기도하는 자세라고나 할까.

마치 자신의 죽음에 마지막 애도의 눈길이라도 보내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애틋한

자세로 머물기를 또한 삼사일 남짓, 그러나 어느 날 소리도 없이 물밑으로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온 적도 없고 간 적도 없다. 다만 맑고

그윽한 향기만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여운으로 남길 뿐이다.

 

 세상에는 고운 꽃, 화려한 꽃들이 많다. 그러나 꽃이 화려할수록

그 지는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장미는 시들어 떨어지고, 모란은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벚꽃 같은 것은 그 연분홍 꽃잎을 시나브로

흩날려서는 늘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다만 수련만은 곱게 피어선

아름답게 질뿐이다.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어느 정숙한 여인의 임종도

이처럼 단아하고 우아할 수는 없을 듯싶다.

 

 사람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짐승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수련이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내가 피의 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한때를 호사와 거짓 위엄으로 살다가 추한

모습을 남기고 마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더욱 절실하게

그것을 느낀다. 어차피 남길 것도 없고 또한 가져갈 것도 없는 빈

술잔에 남은 그런 공허 같은 것들. 한 송이 수련처럼 그렇게

졌으면 싶다. 아니다,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먼 눈빛으로만 그냥 그렇게 스치고 지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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